첫 봉강서도회전 60여명 106점 출품…지방서예계 전례없는 수확
첫 봉강서도회전 60여명 106점 출품…지방서예계 전례없는 수확
  • 김영태
  • 승인 2019.04.01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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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도회원·저명 서예가 참여
전무후무 대규모 전시에
잇단 관람객 방문에 성황
올해 5월 한달 간
소헌미술관서 52회 열려
전국적으로 떠오른 소헌
유명 서예인과 교류 확대
국전서 만난 광주 송곡과
영호남교류전 기틀 마련
경북공보관
경북공보관(구 KG홀)에 걸린 ‘봉강서도회서예전’ 현수막 사진.
 
봉강서도회-첫전시회팜플렛
'봉강서도회' 첫 전시회 팜플렛, 회원작품 93점, 찬조작품 13점 출품되었다.

 

소헌 김만호의 예술세계를 찾아서 (14)-장년시절5. 1968(61세)

 

◇봉강서도회 창립전

소헌 선생의 장년기는 봉강서우회와 함께 했다. 선생은 1957년에 봉강서실을 개원하고 봉강서우회(鳳岡書友會)를 운영하다 11년이 흐른 1968년에 봉강서도회(鳳岡書道會)로 명칭을 개칭했다. 그해 5월에(1~6일까지) 경북공보관화랑(구 KG홀)에서 봉강서도회 창립전 ‘제1회 봉강서도회서예전’을 개최했다. 선생으로서는 참으로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선생이 정성들여 키워온 나무가 찬연하게 열매를 맺었기 때문이다. 이 전시회는 지역 언론들의 적극적인 후원도 받아 더욱 성황을 이뤘다. 예총경북도지부, 경북도교위, 해동서화협회와 대구매일신문, 영남일보, 대구일보 등 대구 3개 신문사에서 적극 후원해 주었다. 더구나 개막 때는 당시 한국예총 경북지부장인 김춘수(시인), 경북도교육감 김판영, 서예가 최중길, 죽농 서동균, 양인석, 서기원 씨를 비롯한 많은 인사들이 참석하여 선생과 함께 개막 테이프를 끊었다. 선생은 참으로 감회가 깊었다. 봉강서도회서예전을 갖기까지 많은 세월이 필요했고 막상 서예전을 열고나니 각계각층에서 많은 호응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봉강서도회서예전는 벽헌 여상기, 우송 김세헌, 소원 이수락 선생을 비롯한 50명의 작품 93점이 전시 되었다. 또한 소당 김대식, 목산 나지강, 학연 문기석, 죽농 서동균, 삼우당 김종석, 희재 황기식, 긍농 임기순, 해봉 이도원 씨 등 대구의 저명 서예가들의 작품 13점이 찬조 출품되어 전시장이 더욱 빛이 났다.

당시만 해도 봉강서도회서예전 같은 대규모 서예전(書藝展)이 거의 전무후무했고, 이 때문에 봉강서도회서예전은 초미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전시장은 연일 관람자들로 붐볐고 동호인들의 찬사와 격려가 이어졌다. 그때 앨범기록에는 “축전 32통, 화환 12쌍, 생화 58분, 프로그램 1천통 발송”이라 적혀있다. 특히 이 전시회를 계기로 서예 입문을 원하는 사람이 늘어나서 봉강서도회의 회세가 커져 갔고 매년 회원전을 여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다음은 학연(學淵) 문기석(文奇錫) 선생이 매일신문에 기고(1968.5.15)한 「봉강서예전(鳳岡書藝展)을 보고」의 기사 내용이다.

「노성(老成)한 작품, 적공(積功)의 흔적. 양적(量的)으로 전례(前例)없는 수확.

서예는 동양의 고유한 예술이다. 우리의 선인(先人)들은 서예를 한갓 취미로서 예능으로서만 즐긴데 그친 것이 아니라 지(紙)·필(筆)·묵(墨) 삼자를 매개로하여 조촐한 인간상(人間像)을 형성했었고 그 기능의 승화된 차원에 있어서는 합자연(合自然)의 妙境(묘경)에까지 진입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예(書藝)는 흔히 서도(書道)라 일컬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격조높은 우리네의 고유예술이 현대의 기계문명의 위력으로해서 일반에게서 소외 당하고 있음이 사실이고 그것은 분명 마음이 허전한 일이 아닐수 없다.

그런데 최근년(最近年)에 서화(書畵)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일부에서 싹트고 있는 듯 보이거니와 이러한 계제(階梯)에 소헌(素軒) 김만호(金萬浩)씨를 중심으로 한 봉강서도회(鳳岡書道會)에서 성황의 서예전을 가졌다는 것은 서도 발전을 위하여 그리고 지방서예계를 위하여 의미깊은 일이요 진정 반가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찬조작품을 포함하여 60여명이 100점을 넘는 작품을 전시하고 있으니 전례없는 성황(盛況)을 이루었다. <중략> 성대한 전시회에 축의(祝儀)를 표하고 앞으로 더욱 연찬(硏鑽)을 거듭하여 봉강서도회의 무궁한 발전을 바라마지 않는다. (문기석)」

그리고 1968년 5월 3일자 한국일보에는 「서예전(書藝展)에 선보인 미국여성(美國女性)」이라는 제목으로 문하생인 헬렌 티쩐(Helen Tieszen, 한국명 지혜련) 씨를 소개하는 기사가 나왔다.

「“처음엔 재미로만 알고 시작했으나 할수록 어렵고 두려워진다”. 5월 1일 경북공보관 화랑에서 열린 봉강서도회서예전(鳳岡書道會書藝展)에 벽안(碧眼)의 미국인 헬렌 양은 이방인으로선 처음으로 전시된 자기 그림 앞에서 흐뭇하고 즐거운양 사뭇 웃음을 감추지 못하였다.

메노나이트 한국지부에 근무하는 헬렌 티쩐(41) 양은 우리나라에 온지 9년. 같은 직장에 있는 한연숙(25) 양이 묵화(墨畵)공부를 하는 것을 보고 지난 1월부터 봉강서도회에서 묵화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우리말이 유창한데다 하루 두끼씩 꼭 한식(韓食)을 한다는 헬렌 양은 요즘 하루 2~3시간 묵화를 그리고 있다. 헬렌 양을 가르쳐 온 소헌 김만호(61) 씨는 헬렌 양이 묵화를 배우게 된지 4개월 밖에 되지 않는데 그의 작품이 적당한 운치(韻致)에다 선(線)이 생동(生動)하는 것은 초년생(初年生)으로 드문 일이라고 칭찬이 대단하다.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 석사학위를 받은 헬렌 양은 “한국에는 훌륭한 예술이 많은데 이를 외국에 소개하는데 소홀하다”고 말하면서 자기가 배운 묵화를 미국에 돌아가 소개하고 보급하겠다고 했다.(得)」라고 작품과 인물사진을 함께 게재해 보도했다.

봉강서도회는 1회전 이후 회(會)의 명칭이 봉강연묵회(1976)와 봉강연서회(1980)으로 바뀌면서 현재까지 한해도 거르지 않고 반백년(51년)을 개최해 왔다. 2019년에는 제52회전(5.1~5.31)이 소헌미술관전시실에서 열린다.

소헌 선생은 문하생들의 첫 전시회를 마치고 의성김씨 종친들의 일에도 역량를 보탰다. 그해 5월 하순에 ‘의성김씨화수회(義城金氏花樹會)’ 회장직을 맡아 집안 종친들과도 폭넓게 교유하고 친목을 도모하면서 바쁘게 지냈다. 그러나 오르막과 내리막이 오가는 인생의 섭리는 선생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됐고, 이 시기 선생에게도 시련이 닥쳐왔다. 그해 6월 24일 상주에 있는 백씨(白氏) 세호(世浩)씨가 별세하면서 한동안 인생의 무상을 느끼면서 허전한 날들을 보내야 했다. 그때마다 서도가 위안이 되어 주었다. 봉강서도회를 중심으로 모이는 동호인들과의 시간이 슬픔을 잊게 하였고, 또한 계속 서도를 추구하는 자극제가 되어 지필(紙筆)과 묵향(墨香)은 늘 선생 가까이 있게 되었다.

◇서예인들과의 교유

봉강서도회(鳳岡書道會)의 융성과 함께 소헌 선생의 이름도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선생의 필명(筆名)이 1960년대부터 전국에 널리 알려지면서 당시 전국에 이름난 서예인들과 교유(交遊)의 폭이 넓어지게 되었다. 서울의 서예가로는 원곡 김기승, 일중 김충현, 어천 최중길, 동강 조수호, 여초 김응현과 교분이 두터웠고, 한학자인 이가원 박사와도 가깝게 지냈다. 특히 어천 선생, 원곡 선생과는 서로 왕래 투숙하면서 친밀하게 지냈으며, 원곡 선생은 그 후 봉강연서회의 고문을 맡기도 했다. 검여 유희강, 시암 배길기 와도 자주 만났다. 또한 국전이 인연이 되어 만난 광주의 송곡 안규동과는 그 후 영호남교류전(1976년)을 이끌어 나가는 사이가 되었고, 의재 허백련, 남룡 김용구, 근원 구철우와 부산의 청남 오제봉, 전주의 강암 송성용과도 친분이 있었다.

대구에서는 소당 김대식, 목산 나지강, 계전 최현주, 죽농 서동균, 학연 문기석, 삼우당 김종석, 희재 황기식, 긍농 임기순 등과 1960년대 초부터 교유했고, 해동서화협회 회원으로 함께 활동하기도 했다. 무위당 이원세 선생과는 외경(畏敬)의 친우(親友)로 지냈다. 이들과의 교유는 서도의 길을 함께가는 동행자로 힘이 되어 주었으며 상호의 자극제 역할을 하기도 했다.

봉강서도회첫전시회
소헌선생 회갑 축하 휘호로 제작한 ‘송수병’, 당대 저명서예가들의 작품이 집성돼 있다.

선생의 회갑 때인 1968년 10월에는 전국의 많은 서예가들이 회갑기념 축하 작품을 보내 주었다. 선생은 이를 보관하기 위해 합작 병풍으로 표구하여 「송수병(送壽屛)」으로 남겼다. 이 병풍은 현재 소헌미술관에 소중히 보존되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의재 허백련, 근원 구철우, 학연 문기석, 죽농 서동균, 남농 허 건, 소당 김대식, 긍농 임기순, 무위당 이원세, 삼우당 김종석, 청남 오제봉, 희재 황기식, 어천 최중길, 우석 김봉근, 목산 나지강, 토림 김종현, 계전 최현주, 송운 정세용, 송곡 안규동, 남룡 김용구, 일중 김충현, 여초 김응현, 강암 송성룡, 해봉 이도원, 고천 배재식, 운여 김광업 제씨의 축하 휘호(揮毫) 작품 들이다.

이 합작병(合作屛)은 가히 일품(逸品)이었고 우리나라 당대(當代) 저명 서예가들의 서화(書畵)가 집성(集成)됐을 뿐 아니라 다양한 개성의 작품들이 집합되어 가히 보물처럼 빛났다.

김영태 영남대 명예교수(공학박사,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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