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든타임
골든타임
  • 승인 2019.04.01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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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시인)




꽃망울 터트리자 시샘하듯 찬바람이 불었다. 성주로 참외를 먹으러 갔다가 그냥 되돌아오던 길이었다.

겨우내 뿌린 씨앗이 열매를 맺기까지 농부의 정성과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어디 있겠느냐만 ‘작물을 고르는 것은 농부가 아니라 땅이라고 했던가.’ 열매를 얻기까지 농부가 주로 할 수 있는 일은 키우는 일이 아니라 때를 알고 기다려 주는 일이 아닐까.

넓게 펼쳐진 비닐하우스는 윤슬 일렁이며 은빛으로 흐르는 강물이다.

강을 지나 한적한 시골길로 접어들 즈음이었다. 길섶, 도랑에 승용차 한 대가 거꾸로 쳐 박혀 있었다. ‘사고가 빈번한 길이니 조심해서 가라’고 설치해 놓은 구조물인줄 착각할 만큼 ‘참 실감나게도 잘 만들어 놓았다’면서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좁은 농로 가장자리에 차를 세웠다.

현장 가까이 다가 간 남편이 “여기 사람이 있다”며 뒤 따르던 제부를 향해 119로 전화부터 하라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연이어 차문을 두드리며 아들 또래로 보이는 청년을 향해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차량의 파손이 심한 상태지만 다행히 청년은 살아 있었다. 밭의 울타리로 쓰였던 쇠파이프 몇 가닥이 부러지기도 하고 더러는 차체를 뚫고 겹겹이 지나가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 청년이 얼굴에 피범벅이 된 채 구겨진 차체의 창문 사이를 비집고 기어 나왔다. 마술쇼에서나 가능한 그런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청년은 그 마을 사람이었다. 집이 바로 근처라고 하는 것으로 봐선 그 길이 청년에겐 너무나 익숙한 길이었을 것이다.

청년은 땅바닥에 퍼질고 앉아 치켜세운 다리 하나에 무릎을 고인 채, 한 손으로는 피가 철철 흐르는 머리를 움켜쥐고 또 한 손으론 핸드폰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리곤 어디론가 끊임없이 전화를 하고 있었다.

청년의 낯빛으로 봐선, 죽음의 문턱을 살아 넘어오면서 처음으로 전화를 건 사람이 부모님은 아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불과 몇 분 지나지 않아 혼비백산이 된 청년의 엄마가 앞서 달려오더니 청년을 와락 끌어안고 펑펑 울음을 터트렸다.

뒤이어 1t 트럭을 몰고 달려온 청년의 아버지는 친구들과 약주를 하셨는지 술 냄새가 파도처럼 확 끼쳐왔다.

“내 새끼다 와. 털끝 하나 건들지 마라. 내 끼다.”를 외치며 청년을 부축하고 있는 사람들의 머리채를 끌어당기거나 욕설을 퍼붓고 고함을 질러댔다.

‘아무리 제자식이라고는 하나 응급처치도 없이 청년을 움직인다는 것은 또 다른 상처를 불러올 수 있으니 119가 올 때가지 제발 참아 달라.’는 주변의 만류에도 막무가내였다. 자신의 차로 싣고 가겠다며 고집을 피우기 시작했다.

귓불을 스쳐지나가는 바람 끝이 제법 시리다. ‘나무는 고요하고자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은 부모를 봉양하고자하나 어버이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말, 그 사이엔 분명 그 때라야만 가능한 ‘골든타임’이 있지 않을까.

부모라고 자식의 속을 다 알 수 없는 것처럼, 겉은 멀쩡해 보여도 뼈가 부러졌는지, 허파에 바람이 들었는지, 속이 썩어 문들어졌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열어보기 전까지는.

지켜보는 청년의 낯빛이 점점 일그러지고 있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듯. 평소에도 그렇게 통하지 않는 아버지라는 듯. 청년의 아버지와 청년을 둘러싼 우린 육지를 손안에 넣고 말겠다는 파도와 그것으로부터 지켜내겠다는 테트라포드처럼 한참을 그렇게 대적하고 있었다. 119 사이렌이 울릴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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