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담인듯 농담인듯 툭툭 던지는 대사엔 죽음과 이별이 스며있었다
진담인듯 농담인듯 툭툭 던지는 대사엔 죽음과 이별이 스며있었다
  • 김광재
  • 승인 2019.04.04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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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다와 젊은 예술가 제이알
프랑스 곳곳 떠돌며 만들어
쇠락한 광산촌 주민들과
항만 노동자들의 부인 등
사진으로 찍어 곳곳에 설치
바르다가사랑한사람들
 
 

아녜스 바르다 감독 별세…그의 영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다시 보기

‘누벨바그의 어머니’ 아녜스 바르다 감독이 최근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지난해 6월 개봉한 다큐멘터리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에서 여든여덟 살의 개구쟁이 할머니를 봤는데, 1년도 지나지 않아 부음이 들려왔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이 그의 마지막 작품이려니 했는데, 그 후에 다큐멘터리 한 편을 더 만들었다. ‘바르다 바이 아녜스(Varda par Agnes)’란 제목으로 자신의 영화감독으로서의 경험을 조명해보는 다큐멘터리다. 지난 2월 제69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상영돼 베를린 카메라상을 수상했다.

어느 평론가가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에 대한 한줄평으로 “‘인간예찬’, 마지막 선물이 아니길”이라고 썼는데, 그의 말처럼 바르다는 선물 하나를 더 남겨놓고 떠난 것이다. 귀한 선물은 아껴둬야 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그의 마지막 영화가 머지않아 국내서 개봉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을 다시 봤다. 이 영화는 바르다가 자신보다 55살 아래의 젊은 설치 예술가 제이알(JR)과 함께 만든 영화다. 제아알은 세계 도시 곳곳의 건물 벽이나 특별한 장소에 거대한 인물 사진을 붙이는 작업을 해오고 있는 아티스트다.

두 사람은 프랑스 곳곳을 찾아다니며 사람들의 사진을 찍고 확대 프린트를 해서 벽면에 붙인다. 쇠락한 광산촌을 찾아가 철거 예정인 광부 사택의 마지막 주민을 찍어 그녀 집 외벽에 붙이고, 옛 광부들의 사진을 확대해 곧 허물어질 붉은 벽돌 위에 붙인다. 주민들은 아무도 관심 가져주지 않는 자신들의 삶과 추억을 되새기며 감회에 젖는다. 두 사람은 염산 제조공장의 노동자들, 시골 마을의 우체부, 혼자 800헥타르의 농사를 짓는 농부, 항만 노동자들의 부인들, 옛 방식으로 염소를 기르는 부부 등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크게 출력해 적절한 장소에 붙인다.
 

바르다가사랑한사람들-2
 

이 영화를 다시 보기 전까지는 사람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과 즐거운 유머로 가득한 영화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시 보니 그것만이 아니었다. 물론 처음 봤을 때도 아녜스 바르다와 장 뤽 고다르의 만남이 이뤄지지 않는 마지막 장면에는 마음이 짠했다. 그래서 극장을 나설 때는 ‘저 두 사람이 이승에서 다시 만날 일은 없겠지’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렸다. 그러나 그것이 따뜻함과 유쾌함을 영화의 전체적인 느낌으로 기억하는 데에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다시 이 영화를 봤을 때는 전경과 배경이 뒤바뀌는 듯했다. 바르다가 자신의 나이 듦과 죽음에 대해 농담처럼 툭툭 던지는 말과 장면들이 예사롭지 않았다. 처음 볼 때는 블랙 유머 정도로 여기고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던 장면들이었는데, 관심을 가지고 보니 죽음에 대한 바르다의 생각과 느낌이 이 영화의 또 하나의 주제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아마 그가 더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 더욱 감상적으로 영화를 보게 만들었겠지만 말이다.

“난 다리도 눈도 불편해. 자네도 흐릿하게 보여.” “제가 도울 테니 더 늦기 전에 최대한 사진을 모아요.” “내가 더 늦기 전에?” “그런 뜻이었겠어요?” “그랬잖나.” 바르다의 식탁에서 두 사람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간다. 장 뤽 고다르를 만나러 가는 기차 안에서는 이런 대화를 한다. “오래된 친구죠?” “‘오래된’보단 ‘길게 만난’이 좋아. 늙은이들 앞에선 말을 가려 해. 어쨌든 맞아.”

또 사진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무덤을 찾아가서는 제이알이 바르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죽음이 두려우세요?” “아니, 많이 생각해 보는데 두렵진 않은 거 같아. 마지막 순간이 될 텐데. 난 기다려지기까지 해.” “정말요? 왜죠?” “다 끝날 테니까.”

 

바르다가사랑한사람들-33
88세의 아녜스 바르다와 33세의 JR이 함께 다큐멘터리 영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을 만들었다.

주름진 바르다의 눈과 발 사진을 붙인 화물 열차가 출발하자 제이알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눈과 발이 이야기를 하네요. 이 기차는 당신이 못 가는 많은 곳을 가겠죠.” “JR, 멋진 여행 고마워.” 이 장면도 죽음과 이별을 빗대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를 두 번째 볼 때의 느낌이 처음과 다른 것은 바르다를 찍는 카메라의 시선으로, 바르다의 감정에 집중하면서 봤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처음과 끝에 장 뤽 고다르가 등장(물론 이름만)한다는 것은 이 영화가 88세 바르다의 이야기가 중요하다는 증거다.

바르다는 제이알이 선글라스를 벗기 싫어하는 것을 보고 장 뤽 고다르를 떠올린다. 고다르와 바르다, 세상을 떠난 그녀의 남편 자크 드미(‘셸부르의 우산’ 감독) 등은 프랑스의 ‘누벨 바그’ 영화 운동을 함께 했었다. 선글라스가 얼굴에 붙어있다시피 했던 고다르가 바르다의 카메라를 위해 선글라스를 잠시 벗어준 적이 있는데 그때 바르다가 33세였다. 88세의 바르다가 33세의 제이알과 함께 하는 여행 프로젝트의 마지막이 장 뤽 고다르가 된 것은 바르다의 의도였을 것이다.

그러면 고다르는 왜 바르다가 찾아온다는 것을 알고도 만나기를 거부했을까. ‘아주 고독해서 예측할 수 없는’ 고다르이니 알 수는 없지만, 짐작건대 바르다가 언젠가 제이알에게 툭 던진 말 “누구를 만날 때마다 그게 늘 마지막 같아”가 이유가 되지 않을까. 고다르와 바르다가 5년 전에 만났을 때도 두 사람은 각자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고다르는 다시 바르다를 만나는 것보다 그때의 만남을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호숫가 벤치에 앉아 슬퍼하던 바르다는 지나간 시절을 떠올리며 “우정의 순간들은 즐거운 추억”이라고 말한다. 바르다를 위해 제이알이 할 수 있는 일은 선글라스를 벗는 것뿐이다. 제이알은 바르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바르다 또래의 나이가 안된 관객들도 마찬가지다.

지난 2월 개봉한 다큐멘터리 ‘칠곡 가시나들’(2019 김재환 감독)에는 아녜스 바르다 감독 또래의 할머니들이 나온다. 그들 가운데 한 할머니가 쓴 시다.

 

내 마음 - 박금분

빨리 죽어야 데는데
십게 죽지도 아나고 참 죽겐네
몸이 아푸마
빨리 주거여지 시푸고
재미끼 놀 때는
좀 살아야지 시푸다.
내 마음이 이래
와따가따 한다

스바르다의집
지난 3월 29일 세상을 떠난 아녜스 바르다 감독의 파리에 있은 핑크색 집 앞에 사람들이 갖다 놓은 꽃들이 놓여있다.

김광재기자 contek@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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