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 놀음
양반 놀음
  • 승인 2019.04.07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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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윤 시인
인도에는 수천 년에 걸쳐 카스트제도가 존재했다. 물론 현재는 법적으로 폐지되었지만, 아직도 곳곳에서 벌어지는 사회범죄 양상의 근원에는 관습처럼 자리하고 있는 것이 바로 카스트제도이다. 아리안족이 인도를 정복한 후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직업 또는 피부색에 따라 승려계급인 브라만(brahman), 군인계급인 크샤트리아(ksatriya), 상인계급인 바이샤(vaisya) 및 천민계급인 수드라(sudra)로 크게 나누고, 다시 수많은 하위카스트(subcaste)를 나누었다. 최하층 계급으로는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 untouchable)이 있다. 간디(Mahatma Gandhi)를 포함한 많은 사회 운동가들은 불가촉천민들을 ‘신의 자식’이라는 뜻에서 하리잔(Harijan)이라고 부르며, 인권보호에 노력을 기울였다. 소수의 지배층들은 대부분 권력을 영유(永有)하기 위한 방편으로 신분제도를 활용해왔다. 대개 원주민을 몰아내거나, 침탈의 경우에는 더욱 악의에 찬 제도를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구실이나 명분은 겉치레에 불과했다.

우리나라의 양반제도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양반과 혼용되어 쓰였던 사대부는 여기에서 파생된 대명사다. 원래 사대부는 양반 중에서도 벼슬을 한 사람을 일컬었으나, 훗날에는 양반 가문을 통틀어 상징적인 의미로 쓰였다. 호란이나 왜란, 하물며 늑약을 체결하는 순간에도 양반은 지배층이었고, 그들은 끈질기게 생명력을 이어왔다. 책임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들의 가장 큰 무기는 ‘명분’이었다.

2019년 4월 4일 식목일을 앞두고, 사상 초유의 산불화재가 발생했다. 지난 4일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강원산불 피해면적은 고성·속초 250㏊, 강릉·동해 250㏊, 인제 30㏊ 등 축구장 면적(7천140㎡) 742배의 산림에 해당하는 총 580㏊에 달했다. 대한민국의 산야가 타들어가고, 온 국민의 속이 타들어 가는데, 그 와중에 여야의원들의 책임공방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화재가 발생한 당일, 국회 운영위원회에서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국가재난 대응 책임자로서 이석 문제를 제기했으나, 자유한국당의 질의가 이어져 속히 자리를 뜰 수 없었다는 책임론이 대두되었다. 강원도 산불의 발생시간은 저녁 7시 17분, 정 실장이 자리를 뜬 시간은 화재 발생 3시간21분이 지난, 밤 10시38분이었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저희도 빨리 보내드리고 싶으나, 질문순서를 바꾸자. 여당 위원들은 질문하지 말고, 야당의원들의 질문만 받으라’고 요구했고, 급기야 홍영표 민주당 원내대표가 ‘모니터를 켜고 속보를 보라’는 말에 비로소 파장(罷場)할 수 있었나보다. 파장이란 표현이 과하다는 생각이 도무지 들지 않는다.

대형 화재 사고가 발생했는데, 외교참사가 더 심각하다고 발언한 정양석 자유한국당의원도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당장 제 나라의 위기도 외면하는 분들이 훗날 다른 나라와의 관계를 걱정한다는 것에 신뢰를 가질 수가 없다는 소리다. 수많은 날들을 당쟁으로 허송세월을 보내왔던 국회의원들의 중요한 정쟁이 꼭 이날이어야 했는가. 오랜 시간 자라온 수목들이 화마(火魔)에 잿더미가 되어 가는데, 꼭 이날이어야만 했는가. 한쪽의 질의만 받아서 속히 의결이 되었다한들, 공정하고 객관적인 결과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말이다. 6일 오전 이낙연 국무총리는 정부서울청사에서 제2차 강원도 산불 관계장관회의를 주재하고 해당 지역에 대한 특별재난지역 선포를 건의하고 문재인대통령이 재가했다. 따라서 강원도 고성군·속초시·강릉시·동해시·인제군 등 5개 시군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되어, 현 정부의 여섯 번째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됐다. 그나마 신속한 결정은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사람의 도리를 내세우면서도, 사리사욕을 채우고 백성들을 하찮게 여겨왔던 양반의 무리가 아직도 잔류한 곳이 국회가 아닐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오죽하면 국회의원을 빗댄 풍자와 비속어들이 네티즌들에게 매일같이 회자될까. 그들만 모르는 걸까. 모르는 척하고 싶은 걸까. 고려시대 경종 1년에 실시한 전시과(田柴科)에서 토지를 지급하기 위해 편의적인 목적으로 나눈 것이 양반이다. 남쪽에 위치한 왕을 중심으로, 문반(文班)은 동쪽에, 무반(武班)은 서쪽에 섰는데, 이 두 반열을 양반이라고 한 것이 시초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접어들어 양반, 중인, 상민, 천민 등 구체적으로 분류되어 백성의 신분이 명료하게 나누어졌다. 인도의 카스트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물며 현재까지도 족보와 가문을 내세워 혈연을 강조하는 이들이 있는 것조차 매우 유사하다. ‘가족’은 사랑하되 ‘조국’과 ‘국민’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자는 여의도에 머물 이유가 없다. 조선시대에도 양반은 군역(軍役)면제의 혜택이 주어졌는데, 자녀들의 군복무 기피에 최선을 다하는 몇몇 정치인들의 행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이들이 이번에 또다시 국민들에게 엄청난 실망감을 안겨 주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들의 양반놀음에 국민들의 혈세(血稅)가 흘러들어갈 명분은 대한민국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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