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도시 통영, 그 밑거름엔 ‘아―派’ 가 있었다
예술의 도시 통영, 그 밑거름엔 ‘아―派’ 가 있었다
  • 김광재
  • 승인 2019.04.11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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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박경리와 작곡가 윤이상, 두 거장이 회고하는 고향 통영
임진왜란 당시 통영은 한촌
전국 8도 장인들이 모여들어
이들이 통영예술의 토양
윤이상
윤이상

 

박경리
박경리

박경리의 에세이집 ‘생명의 아픔’에는 이런 고백이 나온다. “고향이란 인간사와 풍물과 산천, 삶의 모든 것의 추억이 묻혀있는 곳이다. 고향은 내 인생이 모든 저산이며 20여 년간 내 문학의 지주요. 원천이었다.”

통영 박경리 기념관에는 그가 마산MBC와 한 ‘토지’ 완간 10주년 특별대담 중 한 대목이 전시돼 있다. 거기에는 통제영의 중심건물인 ‘세병관’이 일제 강점기에 학교 교실로 쓰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박경리보다 아홉 살 위인 윤이상도 서당을 거쳐 신식학교에 갔는데 세병관을 교실로 썼다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세병관이 지금은 조선시대 모습으로 복원됐지만, 당시 사진을 보면 판자로 벽을 두르고 유리 창문을 넣은 건물이다. 이순신 장군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지은 건물에서 두 사람이 민족의식을 키우며 성장했던 것이다.

윤이상 기념관에는 윤이상의 육필 원고 복사본이 한 편 전시돼 있는데, 독일에서 교포들이 발간하는 잡지의 청탁을 받고 고향에 대해 쓴 글이라고 한다. 이 글에서 윤이상은 해방을 전후한 통영사람들의 모습을 흥미진진하게 그리고 있다. 글 위에 ‘회수록(回首錄)12’라고 적혀 있는데, 회고록으로 쓴 여러 편의 글 중 하나로 보인다. 회수란 말은 원나라의 극작가 마치원(馬致遠)이 시에서 따온 말인데, 지난 일을 돌아본다는 뜻이다. 윤이상의 오페라 ‘류퉁의 꿈’이 마치원의 원작을 각색한 것이다.

◇박경리의 회고

고향사람들 만나니 설렌다. 출생지가 명정리가 아니고 한때 명정리에 살았다. 간창골 너머 서문고개를 지나면 명정리다. 제일초등학교(지금의 통영초등학교 전신)에 다녔는데 그때는 교실이 세병관에 있었다.

내가 통영에서 태어난 것은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친구들과 세병관 교실 칠판에 빨간 분필로 ‘대한민국독립만세’라고 쓰고 일본을 욕하는 글도 썼다. 그때는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해저터널(다이코보리), 충렬사, 세병관을 통하여 어릴 때부터 민족주의를 배웠다. 통영에서 예술가가 많이 태어난 것은 이순신에서부터 출발한다.

이순신은 덕장이면서 에술가다. 임진왜란 당시 통영은 한촌(閑村)이다. 해군본부(우수영)이 들어서면서 8도의 장인들이 모여들었다. 기술자(쟁이바치=예술가)들이 다 모였다. 통영은 기후, 먹거리, 풍광이 아름다워 각지에서 무여든 사람드리 눌러앉아 소목장, 입자장, 선자장, 주석장이 되었다. 이들이 통영예술의 토양이었다. 특히 ‘통영소반’은 특별한 것이다. 통영의 자부심이다. 자연이 아름다운 것은 작가에게 큰 충격을 준다. 통영을 예술가를 배출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진 곳이다.

◇윤이상의 회고

나의 고향 통영(지금은 충무시)에 일제 때에는 민족사회에 두 파(派)사 있었다. 하나는 ‘현실파’요, 하나는 ‘아-파’였다.

인구가 4만여. 항구도시로 시가의 중심지는 모두 일본사람이 차지하고, 우리 민족들은 변두리에 살고 있었다. 여기서 3.1운동 때 격렬한 만세운동이 퍼졌고 많은 희생자를 내었다. 예수교가 일찍 들어왔고(호주선교회 구역) 그를 따라서 서양문화가 들어와, 민족정신도 일찍 깨었다. 이순신 장군의 전적지이기 때문에, 민족의 피에 줄기차게 깨끗한 정열이 생동하고 있었다.

3.1만세 때의 참패를 겪고, 젊은 층에는 차츰 두 갈래의 생활철학이 대두되었다. 하나는, 민족의 역량을 실력으로 길러야 하며, 무엇보다도 돈을 벌어야 한다.―그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제쳐두고, 이를 악물고 일본사람 밑에 들어가서 종이 되더라도 우선 경제와 기술의 실력을 기르자― 그래서 기초교육을 받고, 고장에서 실력 있다고 간주되던 사람들 중에서 주유선(注油選)을 타고, 짐차 바퀴를 끌고, 화물차를 몰거나 일본인이 점원이 되어 끼니를 걱정하지 않고, 더러는 점포를 내든지 논마지기를 사는 사람들이 불었다. 이들은 독서를 하지 않고, 철학하는 것을 경멸하고, 사상경찰에 걸려서 유치장에 끌려가는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비웃었다. 이런 사람들을 ‘현실파’라 불렀다.

이와 정반대로, 민족의 설움이 저 혼자의 설움처럼, 민족의 운명이 저 혼자의 양심에 달려있는 것처럼, 민족의 원수는 일인이기에, 모든 일인과의 타협을 절단하고 오로지 청렴한 양심에서 살자-. 이런 사람들은 더러는 양복도 입지 않고, 두루마기를 위날리며 바닷가에 나가 항상 한탄한다. 겨드랑이에는 대개 책 한두 권을 끼고 다닌다. 일본 강담사에서 발행한 세계문학전집-. 워즈워드나 브라우닝의 시의 구절을 암송하고 슈니츨러의 희곡을 탐독한다. 집에는 끼니를 굶고, 동생들을 학교 보낼 형편이 못 되어도 그들은 결코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다.

호수같이 맑은 바다 위에 뜬 달을 보고 ‘아―’하고, 봄날 아지랑이 이는 전원에 서도 ‘아―’하고, 가을 낙엽을 밟으면서도 ‘아―’한다고 해서, 소위 ‘현실파’들은 이들을 비꼬아서 ‘아―파’라고 불렀다.

이 ‘아-파’의 선배들은 일찍 동경으로 건너가 우선 공부하기 시작했다. 돈 없이 갔으니 낫토(納豆)장사나 신문배달을 하며 학교에 적을 두나 대부분 제대로 공부가 되지 않는다. 고생의 과정에서 권력자에 대한 반항의 철학을 배운다. 그래서 일본의 그때 유행하던 아나키스트들의 영향 속에서 일부는 과격한 무정부주의자가 된다. 이런 일도 있었다. 한 사람이 집을 한 채 빌린다. 그 다음 줄을 이어 고향사람이 따라들어온다. 집세는 반년이고 일년분이 밀린다. 그중에 부잣집 아들이 하나 있어 다달이 송금이 오면 7·8인은 그것으로 산다. 때마다 밀수제비를 먹어야 한다. 겨울이 오면 땔감이 없어, 울타리를 뜯어낸다. 그다음에 집을 입○○ 판자를, 심지어 천정의 널빤지까지도―.

일본사람 집주인이 집세를 받으러 오면 ○○ 피한다. 집세도 2년, 3년이 밀렸다. 어쩌다가 주인이 대표자가 집에 있는 것을 발견하면, 그는 빨가벗고 긴 일본도(日本刀)를 옆에 놓고 정좌를 하고 있다. 그래서 번번이 집주인은 질겁을 하고 도망을 한다. 이 무정부주의자들에게는 ‘죄 없는 개인의 사유재산’이란 도덕이 통용하지 않는다. ‘너놈들이 조선의 식민착취로 얻은 재산의 일부가 아니냐. 조선총독부가 우리민족으로부터 착취한 금액에 비하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이러한 이치이다.

이때를 전후하여 동경서 공부하던 통영 출신의 명사들 중에 유치진, 유치환 형체와 김용식 전 외무장관이 있다. 유씨 형제는 이 무정부주의자들과 정신적으로, 또는 적어도 분위기적으로는 친분관계를 가지고, 또 그 영역에서 살았다. 이때 여기 속하는 사람 중에 예술 계통의 사람들이 꽤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분들이 고향에 돌아와 ‘아―파’를 형성하였거나, 그런 분위기를 조성하였다는 것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윤이상의 베를린 집 침실 벽에 걸려있었던 1950년대 통영항 사진.

이 ‘아-파’로 불리우는 사람들은 비단 비생산적인 생활만 한 것은 아니다. 돈은 없어도 모여서 어두운 불빛아래 시를 낭독하고 철학을 논의했다. 때로는 스스로 각본을 써서 엷은 반일적 연극을 공연했다. 이러다가 좌익운동으로 지하로 들어간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중 ‘순수성’을 고집하던 사람들은 일본경찰의 눈을 피하여 사설도서관을 꾸몄다. 이때 나의 어린 시절 여기서 동화집을 얻어다가 탐독하였다. 이런 시절의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란 나에게는 어떤 예술적인 소양이 형성되는데 도움이 되었으리라고 짐작한다.

물론 이 ‘아-파’의 후배들이 일제 전쟁 말기에 고등경찰의 지목을 받다가 검거되어 옥고를 치른 예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럼 8.15해방 직후에는 이 두 파가 어떻게 됐는가? 소위 ‘현실파’에 속하던 사람들은 재빨리 일본사람들이 던지고 간 상점을 점령하고 경제권을 잡는데 급급했다. 이른바 ‘적산(敵産)’ 처리의 소용돌이 속에 헤엄쳐 다녔다. 그러나 ‘아―파’의 후예들은 먼저 잃었던 민족의식을, 우리말과 우리글을 찾아두기 위해서 이리저리 뛰었다. 이들은 정치를 하는 것을 대개 더럽게 생각했다. 그래서 나중에 많은 사람들이 교육계에 들어갔다. 여기 병행하여 문화협회를 조직하고, 음악회를 열고, 야학을 열어 무산 아동을 교육하고, 연극을 하고 한글강습회를 하고, 이를 테면 계몽운동에 중점을 두었다.

오늘 한국에서는 “통영에서 많은 예술가가 났다”고 하는 말이 정평이 되어있다. 이 말은, 통영에서 ‘아―파’가 닦아놓은 길 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말이리라. 그리고 전 한반도를 돌아봐도 통영처럼 ‘민족의 양심’이 자리잡고 있은 곳도 많지 않으리라.
나는 고향을 떠난 지 30여년! 고향에 누가 살고 있는지, 어떻게 변하였는지, 지금의 젊은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는 진리이 표준을 가지고 있는지? 나는 알 길이 없다.
나는 꿈에도 잊지 않는 나의 고향에 아직도 갈 수가 없다. 그러나 나의 환상 같아서는 옛날 희랍의 철인처럼, 눈에 돋보기를 쓰고 통영의 거리거리를 찾아다니며 소리를 외치며 물어보고 싶다. ‘여기 어디에 아직도 양심이 살고 있는가?’고.  

 

김광재기자 contek@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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