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갑 기념 첫 개인전 준비…화선지 천 여장에 魂 쏟아붓다
진갑 기념 첫 개인전 준비…화선지 천 여장에 魂 쏟아붓다
  • 김영태
  • 승인 2019.04.15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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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갑 때 건강 상태 악화됐지만
이듬해 1969년 건강 회복하며
생애 첫 개인전 작품제작 몰입
屛書 비롯해 다양한 서체 연습
회원일동기념촬영
‘봉강서도회서예전 1회전’ 종료 후 회원 일동 기념촬영(1968.5.6.경북공보관)

 

소헌 김만호의 예술세계를 찾아서 (15)- 장년시절 6. 1968(61세)~1969(62세)


◇병중술회(病中述懷)

서도의 부흥과 함께 했던 중년의 소헌 선생은 바쁜 가운데 행복하였지만 회갑이 가까워지면서 집안에 병마가 드리웠다. 1968년 정월 초하루 소헌 선생은 상주(尙州)에서 백씨와 함께 설날을 맞았지만 명절차례를 마치고 백씨(伯氏)와 대화 중 갑자기 현기증을 일으키며 넘어졌다. 구토를 동반한 고혈압 증세가 발병한 것이다. 다급히 대구로 돌아와서 한양방으로 응급치료를 하여 다행이 며칠 후에 회복이 되었다. 이 시기에는 봉강서도회 전시회를 앞두고 있을 때라 선생은 문하생들의 작품 지도에 밤낮없이 바쁘게 지낼 수밖에 없었다. 5월에 봉강서도회창립전(1968.5.1~5.6,경북공보관화랑)을 성황리에 마쳤지만 선생의 건강은 무리가 뒤따랐다. 그동안의 과로가 겹친 것이다.

그 와중에 집안에 형용할 수 없는 슬픔의 기운이 드리웠다. 6월 24일에 10년 연상(年上)인 백씨(伯氏)가 71세의 일기로 별세한 것이다. 정초(正初) 설날 아침에 백씨 앞에서 현기증으로 넘어졌던 선생은 그 반년후 백씨의 죽음 앞에서 하늘이 무너지는 듯 그 슬픔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당시 형제간의 우의(友誼)가 소문 날 정도로 대단했던 소헌 선생으로서는 기둥 하나가 송두리째 뽑혀 나간 듯 중심을 가눌 수가 없는 슬픔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백씨의 장례를 치루고 난 후 선생은 기어이 고혈압이 발병되어 결국 자리에 눕게 되었다. 급기야 황달까지 겹쳤다. 너무나도 큰 시련을 맞부닥치게 된 것이다.

무신(戊申) 1968년은 선생의 회갑년(回甲年)으로 음력 9월 18일이 선생의 회갑일이다. 경향 각지에서 서예가들이 축하 휘호를 보냈고 지인들의 많은 축하가 있었다. 그러나 선생의 건강 상태는 회갑연을 치를 경황(景況)이 아니었다. 가족과 함께 조용히 지냈다.

다음은 당시 선생이 써 놓은 ‘병중술회(病中述懷)’이다.

「素軒六十一수辰病中述懷/소헌 61수신 병중술회// 虛送世間六十春 書農二端等閑人/허송세간육십춘 서농이단등한인// 衣之食住生涯足 敎而育英不厭貪/의지식주생애족 교이육영불염탐// 桑原寂寞空雙膝 荊체消條割半身/상원적막공쌍슬 형체소조할반신// 未盡生平多小事 心點餘日快精神/미진생평다소사 심점여일쾌정신// 右 戊申九月十九日病中過生日/우 무신9월19일병중과생일// 自吟四韻抄更謄/자음사운초갱등// 又吟一句/우음일구// 病臥稀逢遠近友 每훤平素等閑親/병와희봉원근우 매훤평소등한친」

이를 해석하면

「61세 생일날에 병중의 심정을 술회하다./허송세월 살다보니 환갑이 다가 왔네, 글과 농사 둘다 등한(等閑)하게 살았구나./먹고 입고 사는 동안이 족(足)하였고. 가르치고 키우고 기르는 일에 전념했도다./뜰앞은 가없이 쓸쓸하고, 백형(伯兄)이 별세함으로 반신(半身)만이 남았구나./평생토록 많은 일 다 못해, 얼룩진 마음 한가로이 정신은 맑아 지는도다./1968년 9월19일 병중에 생일을 지나며 사운시(四韻詩) 한수를 읊고 기록하다/또 시 일구(一句)를 읊다/병으로 누워 있으니 원근(遠近)의 친구 만나기 힘들구나, 평소 등한(等閑)시 한 것이 한탄스럽기 그지없도다.

소헌선생회갑기념사진
소헌 선생의 회갑 기념 사진. 배경은 ‘소헌선생송수병(素軒先生頌壽屛)’ 병풍.



갑년(甲年), 60 환갑(環甲)이 다시 시작하는 회갑(回甲)!

보람과 기쁨의 날에 닥쳐 온 불행! 시련치고는 너무나도 가혹한 시련이었다.

그러나 강한 의지의 사람은 하늘이 시험하는 시련에 결코 꺾이지 않는다. 그 시련 속에 있는 삶의 참 뜻을 스스로 캐내어 더 밝고 높은 내일을 창조하는 주춧돌로 삼는다. 선생은 병석에서 오히려 더 강한 충동으로 서도의 근원을 생각하고 있었다.

“서도가 과연 무엇이길래 이토록 나를 사로잡는가? 나는 아직도 서도가 무엇인지 조차 모르고 있지 않는가? 서도에 대한 나의 길을 확립하기도 전에 내가 몸져 누워 있다니…… 아니 된다! 안될 일이다! 여기서 쓰러져서는 안된다. 아직 갈 길은 멀고 할 일이 남아 있는데… 다시 붓을 잡자!” 시련을 극복할려고 안간 힘을 다 쏟고 있었다.

정신력과 의지로 투병한 결과 병세는 차츰 회복되어 갔다. 또한 가족들의 지성과 문하생들의 기도로 병세는 호전되었다.

이를즈음 선생은 병석에서 경상북도가 선정한 ‘학예장려공로상’을 수상했지만 시상식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반갑고 고마웠지만 이러한 수상이 선생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서도의 진정한 뜻을 깨닫기만 하면 더 없는 기쁨일텐데…” 하는 오직 하나의 일념으로 다시 일어서는 것이었다. 선생은 시련을 통해 튀어 오르는 열정을 다시 찾아오고 있었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다가오자 서도의 싸늘한 적막감이 손끝에 맴돌 때 선생은 더욱 더 굳게 붓을 잡으며 서도의 본뜻을 깨닫는 날까지 묵향(墨香)을 벗삼아 고행(苦行)의 길에 오르리라 마음 속 깊이 새김질했다.

◇개인작품전 준비

겨울을 지나면서 선생의 건강은 회복세로 돌아섰다. 이 때문에 선생은 개인 작품을 한번 발표함으로서 자신을 정리해 보고 싶은 원의(願意)를 가지게 되었다. 자아를 확인하고 성찰해 보려는 것이었다. 이해 겨울부터는 개인전 작품준비에 몰입했다.

69년 기유년(己酉年)의 새해가 밝았다. 기유년은 선생이 진갑(進甲)이 되는 해이다. 화사한 봄빛이 들자 선생에게도 다시 봄기운이 찾아왔다. 기유년의 봄은 선생이 60년을 살아오면서 겪은 어느 해의 봄보다 아름답게 보였다. 병상(病床)에서 일어나 뜻한 바를 향해 새로운 생명력을 소생(蘇生)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건강뿐만이 아니라 하늘을 찌를 듯 한 열정(熱情)이 활화산(活火山)처럼 타 올랐다. 이 해의 봄은 쇠퇴해 있던 생명의 불씨가 활활 피어오르는 것을 스스로 절감했다.

그리고 보일 듯 보일 듯 먼 것만 같은 서도의 유현(幽玄)의 길을 멈춤 없이 걸어 나가야 한다는 마음이 더욱 확고해 졌다. 다시 먹을 가는 선생의 손끝에는 긴장이 감돌고 굳건히 잡은 붓끝에는 힘찬 의지가 몰입되어 글씨는 더욱 힘차고 우람하게 표출 되었다.

선생은 작년부터 구상해온 개인전을 5월에 갖기로 결심하고 병석으로 보낸 시간의 아까움을 다시 찾고자 뼈를 깎는 산고(産苦)를 보람으로 환원시키면서 신작(新作)을 만들어 나갔다.

“내 글을, 나의 분신(分身)인 내 글씨를, 아니 바로 내 자신인 나의 작품을 발표하는 것이다. 그 글 속에 살아 숨 쉬는 내 정신이 얼마나 깃들어 있으며, 고행(苦行)으로 닦아온 내 심성(心性)이 얼마나 투영(投影)되어 있는지, 동호인 선배들의 고견(高見)을 들어보자. 그 기탄없는 여론을 겸허히 받아 더욱 내 자신을 만들 수 있는 발판이 된다면 큰 보람이 아니겠는가?”라고 생각하며 한 점(點) 한 획(劃)에 정신(精神)과 혼(魂)을 온통 작품에 쏟아 부었다.

선생은 병서(屛書)를 비롯하여 각 서체(書體)의 작품 제작에 천 여장의 화선지를 소비하였다.

김영태 영남대 명예교수(공학박사,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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