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달성엔 日 요시노산 벚꽃이 흩날렸다
1907년, 달성엔 日 요시노산 벚꽃이 흩날렸다
  • 이대영
  • 승인 2019.04.17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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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영혼 깃든 꽃·나무 심어
달성의 ‘전승성역화’ 추진
오오카미 모시는 신궁 짓고
가이즈카향나무 등 6만주 식재
황국신민화·동방요배 등 강요
신택리지-숨기면꽃이되다
숨기면 꽃이 된다. 일본인의 속마음. 그림 이대영

 

이대영의 신 대구 택리지 - (16)일본인들의 달성벚꽃신국

일본의 속셈을 알려면 그들의 속담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그들은 ‘감추면 꽃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표현(建前)과 속마음(本音)이 다르다.

우리나라는 이중성격 혹은 진짜마음(眞心)과 가짜마음(假心)으로 인식하나, 사무라이 사회에서는 생존방식으로 굳어진 문화적 DNA(Meme, 관습)로 받아들인다. 언행은 물론 역사적 기록까지 감추고 있다.

일본학자들의 저서는 반드시 은사나 최고권위자의 감수를 받는다. 이는 i) 학문적 영역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같은 목소리를 내겠다는 것, ii) 감추고 싶은 것을 같이 감추겠다는 동맹의식이다. 스승과 제자는 학문적 울타리를 같이 하겠다는 것이다. iii) 이렇게 해야 ‘유능한 독수리는 발톱을 감춘다’는 경지에 도달한다. 일본인으로 문화적 밈(cultural meme)을 가졌다면 이 정도는 지금까지 하고 있다.

대구사람들은 우리의 마음으로 일본인들을 이해한다. 그래서 달성공원이란 도시개발차원에서 전국최초로 공원제도를 도입해 준 것이고, 대륙병참기지산업화(大陸兵站基地産業化)터전을 근대화산업의 기반으로 마련해주었기에 일본제국은 오늘의 대구를 태동시켰다고 생각한다.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당시에도 일제가 조선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주장이 있었다. 그들의 속셈을 모르고 겉만 평가한 것이다. 1905년 달성공원화를 계기로, 아마테라스 오오카미(天照大神)를 모시는 황태신궁(현 동북매점 앞 화장실)을 건립, 1913년에 신궁의 요배전(遙拜殿)을 대구신사(大邱神社, 현재 서침나무 위 20m에서 동측 30m 잣나무)로 확대증설, 이미 건립했던 대구신사(大邱神社)를 통한 황국신민화(皇國臣民の誓)와 동방요배(東方遙拜)를 강요했다. 1915년에 증개축을 하고 그들의 마각(馬脚)인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위해 1917년 미쓰비시그룹(Mitsubishi Group)이 칠성동(七星洞)에 조선방직을 건립, 군복 등 군수품을 제작했다. 1931년 만주사변을 위한 대륙병참기지산업화(1931~1945)에 박차를 가했고, 1937년 달성공원은 천황(국고)의 지원을 받는 국폐팔사(國幣八社)의 하나가 되었다.

한편, 당시 일제대륙침략의 대의명분(大義名分)은 아시아 전체의 공동번영을 위함(大東亞共榮)이었다. 즉 ‘대동아공영권(Great East Asia Co-Prosperity Sphere)’이라 했다. 1940년 7월 26일 제2차 군위내각 발족 때 기본국책요강에서 문서화가 되었고, 1945년 8월 15일 패전까지 제창했던 제2차 세계대전 참전슬로건이었다. 기본구상은 1)일만지경제블록(일본, 만주, 중화민국의 경제공동체), 2) 동남아지원공급지역(베트남, 태국, 싱가포르 등), 3) 태평양국방블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은 어디에 속했는가? 황국일본의 신민(臣民)이기에 아예 일본에 포함시켰다.

1592년 임진왜란(文祿の役)의 전쟁대의명분은 36계의 ‘가도벌괵’ 전략을 모방해 중화중심 아시아질서를 일본중심으로 전환하고자 ‘명나라를 칠 테니 조선은 길만 빌려 달라(征明假道)’였다. 일본의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역사적인 프로젝트(historic project)는 AD 240년 이전 일본 신무천황(神武天皇)이 외쳤던 팔굉일우(八紘一宇, eight spokes and one hub) 야망에서부터 나왔다. 일본을 태양으로 하고 주변국가로 광채를 내면서 뻗어나간다는 구상이다. 1872년 사이코 다카모리(西鄕隆盛, 1828~1877)의 정한론(征韓論)은 조선병합(朝鮮竝合)이었다. 이는 일본군 16개 문양의 욱일기(rising sun flag)에 대한 법령제정으로 이어졌고, 욱일기는 1889년 해군 군함기로 사용되었다. 1945년 패전으로 사용이 중단되었다가 1954년에 육상자위대 8개문양의 욱일기(旭日旗)로 다시 제정했다. 이를 전쟁명분으로 철학적 의미를 부여한 게 바로 대동아공영권이다.

다른 나라가 이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이론화한 배경에는 유교문화에서 유토피아(utopia)로 여겼던 대동사회(大同社會)를 표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서삼경(四書三經)의 하나인 예기(禮記)에서도 ‘대도가 행해졌던 때가 천하가 공공(백성들)의 것’이었다고 이상사회로 갈망해 왔다. 메이지유신 때 쇼와연구회(昭和硏究會)에서 동아협력체(東亞協力體), 1912년 중국 쑨원(孫文)의 오족공화(五族共和 : 한족, 만주, 몽골, 위구르, 티벳) 이론을 도입, 일본제국은 오족협화(五族協和 : 일본, 조선, 만주, 중국, 몽골)를 주장했다. 여기에다가 1931년 9월 독일에서 생존권(Lebenstraum)이론이 나오자 일본은 이를 받아서 공영권(Co-prosperity Sphere)을 창안했다. 1943년에 쇼와어진회의(昭和御進會議)에서 대동아정략지도대강(大東亞政略指導大綱)을 제시했고, 이 대동아는 조선, 중국, 핵심국 일본만이 아닌 말레시아(Malaysia), 수마트라(Sumatra) 등을 포함한 대동아였다.

지금 우리나라는 대동아공영권을 허망한 망언으로 듣고 넘겨버리지만, 금년 1월에 한일 해군초계기사건 때에 일본 언론에서는 ‘대동아공영권 초계기(大東亞共榮圈 哨戒機)’라는 보도를 내고 있었다. 이는 “조선 너희들은 일제 강점기에 이미 일본황국신민(日本皇國臣民)이 아니었나?”라는 반문이다. 이제 우리는 분명히 그들의 속셈을 알아야 한다. 또한 절대로 두 번 다시는 당하지 않아야 한다.

대구에 일본인 거주는 1893년 9월 히기츠키 마스키치(膝付益吉, 1872년생)와 무로(室)란 두 사람이 정착해 잡화상을 개점한 것이 시초였다.

청일전쟁을 계기로 일본군의 주둔과 경부철도 공사로 인해 일본인들이 모여들었으며,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한 뒤에는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건 시간문제로 일본인들은 인식했고, 대거 엘도라도를 찾아 대구로 모여들었다.

1903년에 이미 일본인들은 일본인 거류민단과 일본인 대구구락부(Daegu Group)을 결성했다. 1905년 4월 관찰사 이용익(李容翊 ,1854~1907)은 그들이 달성에 전승공원을 만들려는 눈치를 알아차리고, 서상돈(徐相暾,1851~1913)의 아들 서병조(徐丙朝,大峰丙朝,1886~1952)에게 서씨 문중의 땅이었던 달성토성을 뽕밭으로 개간하도록 권유했다. 거류민단 부회장 도쿠라 주로쿠(戶倉十六)와 히기츠키 마스키치(膝付益吉)는 헌병수비대장 히다카(日高) 대위를 시켜 관찰사를 겁박했다. 결국은 달성(토성)을 청일전쟁의 전승성역화를 위한 공원으로 만들도록 했다.

설상가상으로 1905년 12월 수비대장 야마다(山田), 경부 아리마(有馬), 거류민회장 타도고로(田所)가 공원부지 안에다가 황조요배전(皇祖遙拜殿)예정지로 표목(標木)을 세우고 사업추진을 하자고 관찰사 서리 박중양(朴重陽, 1872~1959)에게 승인을 받아내었다. 1906년 일본인 대변기관으로 대구거류민단 사무소를 설치했다. 1906년 11월 3일은 일본 신무천황(神武天皇, BC 711.2.13~585.4.9)의 팔굉일우사업(はっこういちうの役)으로 아마테라스 오오카미(天照大神)신궁의 요배전 건립과 일본 영혼이 깃든 꽃·나무로 성역화사업(和華樹聖化) 구상을 발표했다. 구체적인 성역화를 위한 달성공원기성회(達城公園期成會)를 조직해서 복권사업(1매당 1원, 1등 200원, 회당4천~1만매)을 하고 조선인유지와 일본인들의 후원금으로 신사 기초공사 비용을 마련했다. 1907년 1월 부임한 나카오지(中大路) 이사관은 모금사업을 시작해서 식수대금으로 1만원 이상 모았다. 가이즈카향나무(貝塚息吹), 노무라단풍나무(野村の楓) 및 요시노 사꾸라(吉野の櫻) 등 6만주를 일본에서 구입해 식재했다. 일본 고시(古詩)에 ‘요시노산의 백설을 밟고’라는 요시노산 벚꽃(吉野山の櫻) 200주 이상을 옮겨다 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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