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사는 곳
책이 사는 곳
  • 승인 2019.04.25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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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선 대구교육대학교 대학원 아동문학 전공 강사
우리가 사는 지구별에 사람 수만큼의 다른 생각이 살고 있다. 그 생각들을 만나면 내 삶의 지향에 빛이 반사되어 나를 키워준다. 그 생각들을 가장 쉽고 빠르게 만날 수 있는 길은 책이아닐까 싶다. 그런데 책을 만나는 곳은 어디일까?

봄날 오후, 길을 걷다가 눈에 익은 월간지 ‘좋은 생각’을 만났다. 열 댓 권쯤 될까? 어느 가게 유리창 밖에 나와 가지런히 줄 서 있었다. ‘책이 사는 곳이 아닌 가게 문밖에 나와 있다니?’ 내게 ‘좋은 생각’이나 ‘가이드 포스트’는 군대 갓 입영한 제자들에게 힘이 되라고 일 년간 구독 신청해서 보내는 책이다. 가까이 가서 책 담아둔 통 밑에 쓰인 글씨를 읽었다. “누구든 필요하신 분은 한 권씩 가져가세요.” 충격이었다. ‘아, 이렇게 작은 나눔을 실천할 수도 있겠구나.’ 값없이 그냥 나와 있는 잡지책이 나를 훑어보며 비교를 해대었다. ‘흥, 강의 나가는 학교나 도서관에 갈 때마다 자기가 쓴 책들을 강의료만큼만 들고 가 나누며 생색내던 당신과는 다르지 않나?’ 나는 달아오르는 얼굴로 천사가 사는 집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인테리어 영업을 하는 집 같았다. 가게 문이 잠겨 있어 그냥 지나치는데도 주인의 정겨운 인품이 봄 햇살처럼 마음속 깊이 따스하게 따라왔다. 그리고 오래도록 생각났다.

은행이나 병원, 관공서 한 쪽에 세워둔 도서 진열대에서 책을 만나도 정감이 흐르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산이나 바다에 가도 여행자들이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책을 읽을 수 있는 숲속 간이 도서실이나 바닷길 카페도 많다. 이런 여행길에는 짧은 시간에 후딱 읽을 수 있는 그림책이 딱 좋다. 경남 통영 만지봉을 갔다 나오면서 배 시간을 기다리는 곳에 있던 진열대에서 앤소니 브라운의 ‘겁쟁이 빌리’와 후쿠다이와오의 ‘우리 형이니까’ 그림책을 만났다. 성장기 자존감 형성에 도움 되는 책이라 아이들이 후딱 읽고 가도 좋겠다싶은 책이었다. 나는 강의 자료로 쓰려고 다 읽은 뒤, 손전화기에 사진 파일로 담아왔다. 제주도 소정방폭포를 돌아 올라갔을 때는 ‘소라의 성’ 북카페를 만났다. 거기서 무료 차를 마시며 독일, 볼프 에를브루흐의 “내가 함께 있을 게.” 그림책을 읽었다. 죽음을 안내하는 오리 이야기로, 죽음에 대해 가졌던 두려운 환상을 내려놓고 위로를 얻은 큰책이었다. 나는 주로 대학 도서관과 인터넷 서점을 이용하지만 굳이 책이 사는 곳이 다 이렇게 조용한 격식을 갖추어야만 할까? 지난 겨울, 경기도 광주시내 어느 맛집에 갔을 때 순번 기다리는 방에서 만났던 먹거리와 함께 있던 책들이 생각난다. 한 시간 넘게 기다려야 하는 북적대는 사람들 속에서 군고구마 구워먹는 기계며 팝콘 튀겨 먹는 기계며 커피 빼먹는 기계까지 놓아두었던 그 집 주인은 대박 날 정도로 손님의 취향을 고려한 서비스가 뛰어났다. 거기다 나 같은 활자 중독자들을 고려해 벽 한쪽을 온통 책으로 채우고 있었으니 말이다.

요즈음 전자책이 대세인양 하지만 얄팍한 월간지 한권으로 정을 나누고, 산이나 바다나 음식점에 가서도 쉽게 만날 수 있는 종이책의 가독성은 전자책으로야 흉내 낼 수 없는 편리함과 정겨움 속에서 우리의 자투리 시간을 아껴준다.

돌아보면 그 옛날, 점토판에서 비롯하여 죽간(竹簡), 고대 나일 강 유역에 자생하던 파피루스로 책을 만들 때나 중세에 식용되고 남은 양가죽으로 책을 만들 때는 책 한 권 만드는데 수 십 마리의 양가죽이 필요했고, 동양에서는 한지로 책을 만들어도 책을 구하기 어려운 시대였다. 이렇게 발전한 종이책은 두루마리 매체 형태에서 15세기 활판 인쇄술이 발명된 그 뒤로도 발전되어와 요즈음은 질감 좋고 가독성 좋은 매체로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인터넷과 모바일 시대인 만큼 손전화기나 태블릿, 노트북, 이 북 리드기로도 읽을 수 있다. 다만,이런 전자책들은 화면이 적고, 대화면 디스플레이 기기로 읽어도 한 눈에 읽을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문단이 계속되어 불편하고 전자책 단말기를 조작하는 어려움도 있긴 하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일은 종이책이든 전자책이든, 책은 모두 사람을 키워낸다는 사실이다. ‘나를 키운 책 한 권’ 사례를 보거나, 역사 속에서 훌륭하게 산 인물들은 모두 독서광이었다. 전문서적이 지식과 지혜를 넓혀주고 자기 계발서와 다양한 문학도서가 인격을 이끌고 마음에 위로도 주는 좋은 벗이 된다. 이런 책이 우리 밖에 머물러 있을까? 아니다. 책을 읽고 책속의 길을 찾아가는 사람들 속에 훌륭한 업적과 고매한 인격으로 살아남고 있다. 그래서 나는 벚꽃 구경 가고 싶은 이런 날에도 책의 향기를 쫓아 길을 떠난다. 자투리 시간에도 벚꽃나무 아래서 펼쳐보려고 시집 한 권을 겨드랑이에 끼고 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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