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의 추억
독재의 추억
  • 승인 2019.04.30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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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재
기획특집부장


기억과 추억은 둘 다 지나간 일을 다시 떠올리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쓰임에는 차이가 있다. 기억이란 말은 아느냐 모르느냐 여부에 관심이 있을 뿐, 좋고 싫음의 정서적 평가에는 중립적이다. 그래서 ‘즐거웠던’ 기억, ‘아픈’ 기억, ‘슬픈’ 기억, ‘떠올리기 싫은’ 기억처럼 그 기억을 한정하는 말과 함께 써서, 말하는 사람의 태도를 나타낸다.

추억은 감정적인 측면에 초점이 맞춰진 단어이지만, ‘아련한’ 추억, ‘슬픈’ 추억, ‘아름다운’ 추억, 추억에 ‘잠기다’ 등은 자연스럽지만, ‘혐오스러운’ 추억, ‘몸서리쳐지는’ 추억은 어색하다. 추억이란 말에는 상처, 고통 등의 뉘앙스가 깔려 있지만,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추억은, 약간 쓴맛은 나지만 뒷맛이 달콤하거나 향기로운 감상과 어울리는 말이다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2003)이 개봉했을 때, 살인과 추억의 어색한 조합에 고개를 갸웃했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도 그 의문이 완전히 풀리지는 않았으나 그냥 지나치고 말았는데, 최근에 이 영화를 다시 볼 기회가 있어 그 의문이 되살아났다.

살인을 추억할 수 있는 자는 누구란 말인가. 첫째 살인을 저지르고 붙잡히지 않은 범인이다. 이태원살인사건을 저지르고 미국으로 도망가 여러 차례 친구들에게 자신의 범행을 자랑했다고 하는 패터슨 같은 자가 그런 사람일 것이다. ‘살인의 추억’ 마지막 장면에도 잡히지 않은 범인이 범죄현장에 오랜만에 들렀다는 얘기가 아이의 입을 통해 전해지므로, 그 추억은 살인범의 것이라 할 수 있다.

두 번째로는 형사도 추억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사건 발생 17년 뒤, 두 자녀를 키우는 가장이자 사업가로 살아가고 있는 박두만 형사(송강호 분)도 지나가는 길에 현장에 들러본다. 그의 삶을 뒤흔들었던 연쇄 살인사건조차 ‘추억’의 대상으로 만들 만큼 세월은 강력한 힘을 지녔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는 결코 이 살인을 추억할 수 없는 사람들도 나온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피해자와 고문과 조작으로 억지 자백을 했던 용의자들이다. 마을에서 가장 약한 자라고 할 수 있는 백광호(박노식 분)는 이 사건 수사에 얽혀 들어가 목숨을 잃기까지 한다. 목숨은 부지한 나머지 사람들도 평생을 그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살아야 할 것이다. 그들의 삶은 이 사건 때문에 송두리째 파괴된 것이다.

결국 ‘살인의 추억’은 결국 범인과 형사의 ‘추억’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피해자들을 제외한 영화 속의 나머지 주변 인물들도 모두가 그 사건이 잠잠해지고 시간이 흐른 뒤에는 ‘살인’을 추억할 수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시각을 좀 더 넓혀 ‘살인’이 그 시대를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면 이 영화의 숨은 제목은 ‘군사독재시절의 추억’이 된다. 이러한 해석이 가능한 것은 이 영화가 연쇄살인사건이 벌어진 80년대의 독특한 시대상을 여러 곳에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술집 TV에서 부천서 성고문 사건 뉴스가 흘러나오고, 폭행과 고문을 일삼던 조용구 형사(김뢰하 분)는 대학생들과 싸움을 벌인다. 그 와중에서 입은 상처로 파상풍이 걸려 다리 절단 수술을 한다. 박두만 형사는 그의 책상 아래 벗어놓은, 한 짝에 덧신이 씌워진 군화를 바라본다.

그 덧신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조 형사가 지능이 떨어지는 용의자 백광호를 폭행하는 장면이다. 용의자의 얼굴에 상처가 나자 박 형사가 서랍에서 덧신을 꺼내준다. 조 형사는 덧신을 군화에 씌우고는 백광호를 보고 “예쁘지?”하더니 “이거 까지지 말라고 신는거야 이놈아”라고 하면서 계속 군홧발로 차고 밟는다. 군사독재시절 많은 피해자들이 고문 사실을 폭로하고 고발했으나, 우리의 사법 시스템 종사자들과 언론은 대부분 증거가 없다는 말로 간단히 외면하지 않았던가.

군화의 은유는 뻔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를 바라보는 박두만 형사의 시선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또 그의 폭력과 고문을 질책하면서 똑같이 폭력을 행사하는 신동철 반장(송재호 분)의 태도는 어떤가. 두 사람 모두 조 형사의 급한 성격이 문제일 뿐, 들통만 나지 않으면 문제없다는 태도다. 서울에서 온 서태윤 형사(김상경 분)조차도 그들의 구시대적 수사방식을 경멸하면서도 피해자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는다.

인권을 쓰레기통에 처박고 한 수사의 성과라는 것도 초라하기 그지없다. 미국의 DNA 검사에 모든 것을 걸고 있다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결과 통지서가 날아오자 물거품이 돼 버리는 수사다. 이 영화는 시골 경찰서에서 벌어진 일을 보여주지만,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온 80년대의 초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관객들에게 당신은 그 시대를 편안하게 ‘추억’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묻고 있다. 뜬금없이 ‘독재’란 말이 난무하는 시대가 되니, ‘살인의 추억’을 ‘독재의 추억’으로 다시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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