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 태양처럼 쑥쑥 자라는 향나무…‘욱일승천’ 그 자체
타오르는 태양처럼 쑥쑥 자라는 향나무…‘욱일승천’ 그 자체
  • 이대영
  • 승인 2019.05.01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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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든 잘 크는 가이즈카향나무
동서고금 막론하고 항상 인기
중세시대엔 전염병 막는 ‘방병림’
미국 남동부는 조경수로 많이 심어
우리나라도 공진단 등 고급약재 활용
유교사회 각종 종교제례에 사용
지금도 연필 중 향나무연필이 최고급
일본, 대동아공영 목적 달성 위해
한국 등 주변국가에 보급 힘 써
불타는태양
 

 

 

이대영의 신 대구 택리지 (18)가이즈카신국은 올 것인가

동서양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이즈카 향나무(Hollywood Juniper,カイヅカビャクツン)를 좋아한다.

가이즈카 향나무에 열광하는 이유엔 몇 가지가 있다. 가이즈카 향나무는 i) 특히 소금이 많은 해변 등 척박한 토질에서도 잘 자라고, 화씨(F) 10도(섭씨 영화 12.22.도)의 추위에서도 생육한다. ii) 중세기 페스트 혹은 전염병은 물론 거미, 진딧물 등의 해충까지 죽이는 3천600여종의 파이토 케미컬(phytochemical)의 살충(균)효과를 이용한 방병림(防病林)으로 식재했으며, 최근 대기정화(大氣淨化) 수목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iii) 1890년 설립된 요코하마 종묘상(Yokohama Nursery Co. Litd)은 1898년 뉴욕지사와 1907년 런던지사를 설립, 1910년대에 런던식물박람회에 향나무분재 출품 및 판매, 1912년에 워싱턴 백악관 벚나무 300 그루를 동경도지사와의 전략적인 이벤트로 추진했다. 미주리식물원(Missouri Botanical Garden)을 통해 1920년 가이즈카 향나무(Kaizuka Juniper)를 판매했으며 미국 서남부 주변도시에 보급했다. iv) 가이즈카 향나무의 열매(씨앗)는 작고 고소하고 향기로워서 솔새, 참새와 같은 작은 새들까지 좋아해 새들이 잘 모이는 조경수로 유명하다. v) 미국에서는 쑥쑥 성장하는 모습이 할리우드배우처럼 시원스럽다고 할리우드 주피터(Hollywood Juniper)라는 이름으로 남동부에 가장 많이 심겨지고 있는 조경수가 되었다.

vi) 가이즈카(貝塚)라는 성씨는 2015년 일본 인구조사에서 전국에 800여 명이 있고 일제식민지침략 당시의 유명한 학자로는 가이즈카 시게키(貝塚茂樹, 1904~1987)라는 교토대학 교육학자이면서 동양사학자가 있다. 지리적으로는 오사카(大阪) 옆에 가이즈카(貝塚)시가 있다. vii) 오사카 지방자치단체에서는 가이즈카 향나무가 사과 등 과수원에 적성병(赤星病)을 옮긴다고 제거하는 조례를 최근에 제정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과거 BC 650년 이전 시경(詩經)에서 카이펑(檜風)이라는 ‘진펄에 장초나무’라는 환상적인 시(詩)가 있다. 여기서 소개하면:

“진펄에 장초나무 있으니, 쑥쑥 자라는 가지, 젊고 싱싱함이 아름답기만 해, 네 처지를 모르니 부러워라! / 진펄에 장초나무 있으니, 탐스러운 그 꽃 아름답기만 하구나, 집 없는 네 처지를 모르니 즐겁기만 하구나! / 진펄에 장초나무 있으니, 그 열매 맛있기만 해 모두들 모여드니, 짝 없는 네 처지가 즐겁기만 하구나!”

다른 한편, viii)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이즈카 향나무에 반한 것은 각종 종교제례에 사용하는 향나무 제기(祭器)에다가 한약의 공진단(供辰丹) 등 고급약용 심향 혹은 매향(埋香)으로, 유교사회에서는 6급 이하 관리들의 홀목(笏木)으로 향나무를 사용했다. 지금도 향나무연필이 최고급으로 여겨진다. 가이즈카 향나무(Hollywood Juniperus Kaizuka)의 심목(心木)의 수지 혹은 열매(juniper berry)는 스칸디나비아 및 유럽에서 향신료로 식용한다. 서양에서 때로는 주니퍼 베리(juniper berry)를 타태제(墮胎劑)로 악용했다. 이에 반해 동양한약에서 타태제(墮胎劑) 혹은 유산제(流産劑)로는 우리나라는 산조인(酸棗仁)을, 일본은 산장(酸漿, 꽈리)을 사용했다.

ix) 일제가 암묵적 정책으로 보급했을 가능성이 있다. 대만(臺灣)은 일본의 식물학자 다시루 안데이(田代安定,1857~1928)에 의해 1901년에 도입, 전국적으로 심겨졌다. x) 미주리식물원(Missouri Botanical Garden) 홈페이지는 영국 버밍엄식물원에 있는 ‘오미야 나무(大宮の木)’는 250년 이상 되었으며, 미국국립수목원(National Arboretum)이나 페닝박물관(Penjing Museum)에 있는 고신(御心)이란 분재도 일본에 도입된 가이즈카향나무(Hollywood Juniper) 분재(bonsai)라고 소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가이즈카 향나무(貝塚息吹)가 속성수(速成樹)답게 쑥쑥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중국인들은 시경에서 시집갈 때가 된 처녀처럼 장초로 표현했고, 미국인들은 캘리포니아 할리우드 주변에 많아서 할리우드 미남배우처럼 봤으며,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욱일승천(旭日昇天)의 일본상징에 적합한 ‘타오르는 불꽃(燃える炎)’ 혹은 ‘이글거리는 태양(burning sun)’으로 봤다. 일본제국은 대동아공영을 위해 핵심일본의 상징을 주변국가에 이식시키고자 했을 것이다. 중국은 춘추전국시대부터 줄기가 비틀면서 올라가는 모습(螺絲木)을 국왕의 상징인 용에 비유해서 용트림나무(龍柏)로 정원에 많이 식재하고 있다.

1910년대 대구에 거류하는 일본인은 1만2천명으로 인구의 30%에 육박했지만 그들의 기세는 등등했다. 일본거류민의 세력이 얼마나 대단한 지는 대구읍성철거에 대한 조선국왕의 윤허(允許)가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1903년 일본군대와 철도국 직원들이 일부를 허물었고, 경상도 관찰사(觀察使) 겸 대구군수 박중량(朴重陽)까지도 그들의 기세에 밀려 1906년에 스스로 완전히 허물어버렸다. 그들은 조선국왕까지도 안하무인(眼下無人)이었다. 일본제국의 국익을 빈틈없이 챙겼으며 그들의 기득권은 철옹성이었다.

‘숨기면 꽃이 된다’는 습성대로 황국신민에 관련된 대동아공영 혹은 팔굉일우는 꼭 숨겨야 할 발톱이었다. 조선총독부의 기록은 물론이고 일본지식인들이 작성한 기록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여과지(濾過紙) 혹은 분석틀(analysis frame)을 만들어서 검증할 필요가 있다. 지금도 일본 지식인들은 학파거두(學派巨頭)의 감수(監修)를 받거나 추천사(推薦辭)를 저서의 서문에 게재한다. 일제강점기엔 조선총독부의 검열뿐만 아니라, 조선거류 일본학자들 사이에도 국익누설방지를 위한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s)’으로 감수제(監修制)가 대단했다.

1904년 대구에 와서 조선민보사(朝鮮民報社) 사장, 경상도평의회 회원, 야에카기조(八重壇町) 사업의 자본가였던 가와이 아사오(河井朝雄, カワイ アサオ)는 신문에 수많은 칼럼을 썼다. 우리가 금과옥조로 여기는 ‘대구이야기(大邱物語)’를 1930년에 자신의 신문사에서 출판했다. 1921년 10월 1일자 조선(朝鮮) 잡지에 ‘화룡점정을 바란다(畵龍點睛を望む)’는 3면의 장문으로 “시작보다 끝마무리를 잘 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30년 6월 12일부터 10월 중순까지 조선민보에 110회에 걸펴 ‘나를 중심으로 한 대구역사(私を中心とした大邱史)’라는 칼럼을 게재했다. 26년간 대구생활을 청산하면서 애증을 담았던 글을 통해 뼛속까지 일본인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6월 12일 큰 뜻을 품고 일본에서 대구로 오는 과정을 ‘하타지 마루호 조난의 현해탄을 건너서(常陸丸遭難の玄海を渡る)’, 7월 17일 이토 히로부미와의 대구인연을 ‘타고오신 이토공, 대구는 평온해(乘立んだ伊藤公 大邱は平穩)’, 7월 20일 세상변화의 전반을 회상하면서 ‘네 가지 은혜에 감사하고 갑진모임을 살려서(四恩を感謝して 甲辰會生る)’, 9월 3일 3.1운동 등으로 일제식민지에 저항하는 조선인들의 군상을 보고 ‘선인들이 피 흘렸는데 폭도가 횡행하는 때(先人の血は渗む 暴徒橫行時代)’라는 글을 남겼다. 그의 ‘대구이야기(大邱物語)’에선 “당일 달성공원에 행차하여, 폐하께서 친히 기념수를 심으시고, 이토 히로부미 공의 기념식수가 있었지만, 오늘날 그 흔적을 찾아볼 길이 없다”라고 기념식수사실을 기록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일본사람들은 폭도횡행의 시대로 인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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