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 나면
자고 나면
  • 승인 2019.05.13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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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시인)
눈만 뜨면 무제한 용량의 하루가 주어지지만, 반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보내기 일쑤다. ‘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이 어제 죽어간 이들이 그토록 열망하던 내일이다’했거늘 나이가 들수록 몸은 시간을 감당하지 못하고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고독 속으로 깊이 빠져드는 듯, 그저 시간이란 가위에 눌려서 손 놓고 바라만 봐야 하는 경우가 잦다.

무엇을 비우고 어떤 것들로 채우고 살아야 할지 생각해 보는 것마저 무의미한 일상의 반복이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기운이 달리면 숲속으로 들어가 두 팔을 활짝 벌린 채 소나무에 등을 기대고 그 나무의 기운을 받아들인다고 한다.

이처럼 생각이 정리되지 않거나 마음이 복잡한 날, 나는 아버지의 뜰을 향해 걸음을 떼곤 한다. 샛길이 있지만 멀리 있는 길을 일부러 돌아서 간다.

아버지가 가시고 난 이후, 지금은 공터로 남아있지만, 한때 그 길엔 한결같은 웃음으로 지친 내 마음을 환하게 껴안아 주던 아버지의 바람이 노란 국화꽃으로 피어나던 곳이다.

아버지가 떠나신 지 여러 해의 계절이 왔다가 또 그렇게 흘러갔다. 아파트 담벼락 옆, 버려진 작은 공터에 계절마다 어김없이 국화꽃이며 상치며 고추며 가리지 않고 텃밭 가득 심었다.

그리고 빼놓지 않고 꽃으로 울타리를 치셨다. 그곳에 가면 여전히 아버지가 심으신 국화꽃 향기가 무료한 삶에 한 줄기 빗방울처럼 내 맘을 적셔 줄 것만 같다. 당뇨병을 끝내 이기지를 못하고 돌아가시던 그 날까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쉬지 않고 뭐든 심고 가꾸셨다. 병마와 싸우시듯 공터마다 꽃으로, 채소로 가득 채우셨다.

바깥출입이 어렵게 되면서, 침대 위의 삶이 시작됐고 푸르던 육신은 고목처럼 말라 들어갔다. 다리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구더기가 환부에 달라붙어 아버지의 남은 삶을 갉아먹고 있었다.

아버지가 태어나시던 날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머리맡, 아버지가 틀어놓은 라디오에선 옛 노래가 쉼 없이 흘러나오고 ‘불효자는 웁니다.’ ‘울고 넘는 박달재’ 등 좋아하시는 노래라도 나오면 할머니를 향한 애타는 마음이 마치 강이 범람하듯 아버지의 눈에선 눈물이 흘러넘쳤다.

“내가 죽으면 할머니 곁에 묻어 줄래? 딸아”

사는 내내 소원하셨지만 죽어서도 아버지는 그 꿈을 이루지 못하셨다.

아버지가 가시던 때는 가을이었다. 그 해도 어김없이 한쪽 다리를 절며 희망의 씨앗을 뿌리셨다. 노란 국화가 꽃밭 가득 물들면 세상 누구보다도 당신 딸이 꽃같이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가슴 가득 품에 안겨 주면서

“예쁜 꽃병에 꽂아 두고 보면서 속 썩고 살지 마라.” 다독이곤 하셨다.

사람의 머리로는 해결해 줄 수 없는 문제를 시간은 가끔 해결해 주는 수가 있다고 한다.

누군가의 죽음에서 삶의 방향을 물을 때가 있다. 삶에서 죽음의 해답을 얻는 것처럼.

가깝든 멀든 살아생전 아버진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던지면 ‘한밤 자고 나서 말해 줄게. 하룻밤만 기다려.’하시곤 했다. 무엇을 묻더라도 그렇게 꼭 대답을 해 주셨다.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일수록 조급히 해결해버리려고 서두르지 말고 한 걸음 물러서서 조용히 이모저모를 살펴보는 것이 지혜로운 해결책이 될 것이라며 ‘시간 밖에서 우리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던 법정 스님의 책 ‘오두막 편지’ 중 한 대목을 아버지 말씀처럼 끌어안아 본다.

아버지가 내게 그랬듯이 이제는 내가 아버지 품에 국화꽃 한 다발 안겨 드리며 “아버지, 큰딸. 세상 누구보다도 꽃같이 아름답게 잘 살아가고 있어요.” 라고 말씀드리려 한다. 내년에도 또 다음 해에도 어김없이 내 맘속 국화꽃은 피고 질 것이다. 그때마다 나는 아버지가 주는 메시지를 기억할 것이다.

“사는 게 때로 힘들어도 살아있는 건 아름다운 거야. 그러니 사랑하는 큰딸. 힘내”

바람에 날려 온 감꽃 향기가 두 눈에 흐르던 물빛 하나 지우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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