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겁게 누리자” 놀이로 승화시킨 희로애락
“즐겁게 누리자” 놀이로 승화시킨 희로애락
  • 황인옥
  • 승인 2019.05.13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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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미 초대전…내달까지 대구보건대
화업 40여년 대표작·신작 ‘총망라’
동심 소환하는 아기자기한 패턴
알록달록 화려한 원색미 ‘눈길’
문자 등 텍스트 입혀 스토리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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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미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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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미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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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미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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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화가 이명미
젊은 시절에는 소위 말하는 겉멋에 절어 살았다. 철학책은 뒤적여야 지성인이라 여겼고, 개념 정도는 만지작거려야 의식 있는 작가라 믿었다. 사회참여적인 작가라기에 애매한 지점이 없지 않았지만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나 에드문트 후설의 현상학을 외쳤다. 옥상에서 돌로 눌러 색이 바랜 스폰지를 전시하고, 비닐봉지 중간에 고무호수를 끼우고 물감을 부은 작업을 발표하며 아방가드르의 첨병을 달린다고 생각했다. “카메라 필름 끼우는 방법도 모르면서 사진을 찍었죠. 창피한 일이었어요. 사회적인 예의를 무시하고 내 의지대로 행동한 시기였어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개념과 철학을 외칠수록 알 수 없는 공허가 엄습했다. “남의 옷을 걸친 것 같은 부자유가 온몸을 감싸 도는 것 같았어요.” 공허함이 부끄러움으로 변할 때 쯤 무언가에 끌린 듯 캔버스에 그림을 그렸다. 화폭이 색으로 물들었고, 가슴에는 희열이 차올랐다. 개념 가득한 철학적 몽상가에서 색으로 세상을 표현하는 화가 이명미로의 환골탈태였다. 작가가 20대 중반의 일로 기억했다. “계몽가적 태도가 체질에 맞지 않았고, 그래서 버렸어요. 그러면서 미술이야말로 창조라는 생각을 했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놀이’를 시작하게 됐어요.”

서양화가 이명미의 대구보건대학교 기획초대전이 6월30일까지 열리고 있다. 1976년의 초기 작품부터 올해 신작까지 총망라해 소개된다. 홍익대 미대를 졸업하고, 1970년대 한국 현대미술사의 전환점이 된 대구 현대미술제 발기인으로 참여한 정신과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며 특유의 원색과 형상으로 독창성을 확보한 다양한 스펙트럼의 평면회화 56점, 설치 2점 등 총 58점의 작품을 걸었다.

1전시실에서 5전시실을 지나면 어느 순간 한 소녀의 존재가 감지된다. 작고 순수한 소녀가 전시장을 사뿐사뿐 뛰어다니며 물감을 가지고 노는 장면이 연상된다. 일종의 착시현상인데, 그 환영이 지극히 자연스럽다. 과감하고 화려한 원색, 동심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아기자기한 패턴들에서 풍기는 순수성이 존재하지 않는 소녀의 존재를 인식하도록 이끌었을 것이다.

작가가 “지금까지의 작품 제목은 모두 ‘놀이’”라고 했다. 작업이 곧 ‘놀이’라는 의미. 이번 전시 제목이 ‘Game(놀이)’가 된 이유이기도 하다. “처음 작업할때부터 재료를 가지고 놀았다는 느낌이 들어서 첫 평면 작품 제목을 ‘놀이’로 했는데, 그 태도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죠. 작품 제목도 ‘놀이’ 시리즈로 쭉 왔죠.”

첫 작업은 색면 위에 다양한 패턴들로 채웠다. 이후 색면이 넓어지거나 패턴이 강화되기를 반복하며 변화를 거듭했다. 동심이 그렇듯 판타지적 요소도 드러나고, 동화 속 세상 같은 이야기도 넘실댄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문자나 숫자 등의 텍스트가 스토리적 요소를 강화한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눈부신 행복, 방해받지 않는 고요, 적당한 비극, 미칠 것 같은 슬픔을 모두 맛보았죠. 어느 하나만 뽑아도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될 수 있는 삶을 살았어요. 그 이야기들이 색과 패턴과 텍스트로 드러나는 것 같아요.”

전작 중에서 심화를 위한 수정은 가능하지만 자기복제는 하지 않았다. 호기심이 끊임없이 올라오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넘실대는데 굳이 자기복제를 할 이유가 없었다. 마르지 않는 샘같은 창작 원천은 어린시절부터 몸에 배인 독서와 관계된다. 작가는 어린시절부터 책에 묻혀 살았다. 초등학교 5학년때 닥터 지바고를 읽고, 중2때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었다. “뜻도 모르고 읽었어요.”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읽은 책들은 작가생활의 버팀목 역할을 했다. ‘정신’에 대한 이야기다. “밝고 예쁘고 사랑스럽지만 잡스럽지 않아야 하는데 그 중심을 잡아주는 것이 책에서 배웠던 예의범절이나 선비정신 같은 것이라 생각해요. 비록 찰나의 비명을 지르더라도 그림에서는 정화된 감정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놀이’는 곧 작가의 개인사다.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희로애락을 놀이로 담아냈다. 그러나 현실 속 희로애락을 정화하지 않은 민낯으로 드러내는 것은 자존감이 허락하지 않았다. 타고난 긍정적인 에너지로 정화하여 놀이처럼 표현하는 것을 초점으로 맞췄다. 그 이면에 ‘성찰’이 있다. 70을 앞두고 있지만 여전히 작가로서의 성찰을 멈추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과연 가슴을 찌르는 작업을 하고 있는지?”를 계속해서 자문하고 있다는 것. 작가는 “지금 내 나이에 그런 질문을 하는 것만 해도 행운”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여전히 “다른 사람이 안한 것 해고 싶다”며 창작열을 불태웠다. “다음 세대가 뽑아 쓸 코드를 가진 작가가 되고 싶어요. ‘놀이’를 통해 맛과 멋을 동시에 가진 그런 작업을 계속해서 보여드리고 싶어요.”

황인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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