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의뢰인' 사건을 지켜보기만 한 자, 그는 무죄일까
'어린 의뢰인' 사건을 지켜보기만 한 자, 그는 무죄일까
  • 배수경
  • 승인 2019.05.23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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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 계모 아동학대 사망사건 재구성
대형 로펌 변호사 ‘정엽’과
동생인 ‘민준’을 죽였다고
죄를 뒤집어 쓴 누나 ‘다빈’
사회적 제도의 허점 안에서
계모의 폭력에 짧은 생 마감
알면서도 방관한 이웃·담임
또 다른 의미의 범죄로 시사
어린의뢰인-다시
어린 의뢰인

1964년 3월 미국 뉴욕에서 제노비스란 여인이 강도에게 무참하게 살해되었다. 38명의 이웃이 현장을 목격했지만 아무도 그녀를 돕거나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이후 제노비스 사건은 지나치게 과장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긴 했지만 방관자 효과의 대표적인 사례로 자주 언급되어진다) 과연 사건을 지켜보기만 했던 방관자는 유죄인가? 무죄인가?

‘어린 의뢰인’은 이런 질문과 함께 시작된다. 서울의 대형로펌 입사를 목표로 하고 있는 정엽(이동휘)은 잠시 지역 아동복지센터에서 일을 하게 된다.

그는 근무 첫날 계모(유선)의 학대를 경찰에 신고한 다빈(최명빈)과 민준(이주원) 남매를 만나게 된다. 아이들은 그를 ‘좋은 아저씨’로 생각하며 의지하고 그는 아이들이 귀찮기만 하다. 원하던 대형로펌에 합격해 서울로 떠난 정엽은 어느날 다빈이 민준을 죽였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된다. 이후 이야기의 전개는 뻔하다. 그렇지만 영화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크다. 그동안 ‘선생 김봉두’,‘이장과 군수’ 등을 통해 현실의 문제를 웃음으로 승화시키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던 장규성 감독이 2013년 일어난 ‘칠곡 계모 아동학대 사망사건’을 소재로 재구성한 영화이다. 이번에는 웃음보다는 현실의 문제 쪽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는 듯 보인다.

세계의 여러나라가 체벌을 금지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사랑의 매’라는 말과 함께 어느정도 체벌이 용인되고 있다. 특히 부모의 폭력은 ‘내 아이는 내 방식으로 교육한다.’라는 말로 쉽게 정당화 된다.

영화 속 친부 역시 “내 새끼 내가 때려죽이든 말든”이라고 당당하게 소리를 친다. 학대를 당한 피해 아동이나 주변 사람들이 신고를 하더라도 친권자인 부모가 아이를 데리고 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2017년에 이르러서야 아동학대 평가가 나오면 친권자에게 보내지 않아도 되는게 가능해졌지만 여전히 아동학대 이야기는 심심치 않게 뉴스에 등장한다.)

경찰에 신고를 하면 아동복지센터로 보내지고 법적으로 아무런 구속력이 없는 사회복지사는 아이를 가해자인 부모 품으로 돌려보낼 수 밖에 없다. 폭력을 벗어나기 위해 경찰에 도움을 요청하지만 다시 그 집으로 돌아와 더 심하게 학대를 당하게 되는 악순환 속에서 아이들은 결국 누구도 자신을 도와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사회적 제도의 허점 안에서 민준은 계모의 폭력으로 안타깝게 짧은 생을 끝낸다. ‘조금 억울해도 사는게 낫잖아’ 이미 어느 누구도 자신을 보호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다빈은 계모의 죄를 뒤집어 쓰는 대신 사는 길을 택한다.

남매가 무차별적인 폭력에 시달릴 때 “오늘따라 좀 심한데?”, “남의 집일에 신경 쓰는 거 아냐. 우리 애한테나 잘해.”라는 이야기를 나누는 아랫집 부부, 아이가 지속적으로 폭력을 당하고 있다는 조짐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한 담임을 보면 다시 영화 초반에 언급된 제노비스 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쯤에서 다시 똑같은 질문을 던져본다. 과연 방관자는 유죄인가? 무죄인가?

영화는 어찌보면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다. 과연 그런 일이 있을까 싶은 일들이 실제로는 생각보다 더 자주 일어난다. 아동학대 사건은 해마다 늘어나고 가해자 5명 중 4명이 부모라는 씁쓸한 자막은 영화가 끝나도 쉽게 자리를 뜰 수 없게 만든다.

영화 속 대사를 빌자면 ‘그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 아이는 없다.’ 그렇지만 지금도 우리와 가까운 곳 어디선가 또다른 다빈이와 민준이가 똑같은 고통 속에 놓여있을지 모른다. “엄마는 어떤 느낌이예요?”라고 묻는 다빈이를 바라보며 가슴 먹먹하고 아프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영화 관람을 끝내고 나면 무관심과 방관 역시 또다른 의미의 범죄라는 깨달음이 관객 모두의 마음 속에 자리잡기를 바래본다.

배수경기자 micbae@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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