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정신·정서 살리는 데 書道 제격이라 믿어”
“우리 정신·정서 살리는 데 書道 제격이라 믿어”
  • 김영태
  • 승인 2019.05.27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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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세 경북문화상 수상자 선정
강렬한 구도정신과 후진 양성
향토문화 발전 기여 공적 인정
일부 서풍만 내세운 국전 비판
지역 서예인에 노력 경주 당부
서예대회서 학생 실력 확인
교과목으로 서예 채택 주장
왼쪽첫번째가소헌선생
1971년 5월 30일 경북문화상 시상식장에서 소헌 선생(왼쪽 첫 번째)과 계명대 김진균 교수(세번째)가 앉아 있다.

 

소헌 김만호의 예술세계를 찾아서 (18)-장년시절9. 1971(64세)

소헌(素軒) 선생의 봉강서숙이 중심이 되어 뜻이 맞는 서우(書友)들이 인격(人格)을 기르고 예도(藝道)를 닦기 위해 발족(1970년)한 봉강서계(鳳岡書)는 서예 보급의 확대라는 사회적 분위기와 맞물려 성장했다. 소헌 선생과 철웅 스님과의 일화는 그런 분위기를 대표적으로 드러낸다. 봉강서계 발족과 함께 입계한 철웅(哲雄) 스님은 팔공산 성전암(聖殿庵)에 은거하기 이전에 소헌 선생에게 서도(書道)를 사사했다. 은거 후 그는 성전암에 찾아오는 신도들에게 ‘소헌(素軒)선생은 이미 득도(得道)한 분’이며 ‘그의 글씨는 신필(神筆)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를 종종 했다고 한다. 철웅은 성전암의 현액과 주련을 소헌 선생의 글씨로 서각(書刻)해서 걸었고 선생의 친필 체본(體本)으로 스스로 서도를 수련하고 있었다.

다음은 철웅과의 일화 한토막이다. 「어느날 소헌 선생이 철웅에게 “시내 어느 다방에 내 글씨가 걸려 있다는데 그게 사실이냐? 그런 장소에 걸어 놓으라고 내가 글씨를 써 주었는가?” 소헌 선생의 말에 철웅은 순간 당황하고 놀랐지만 “선생님 글씨는 많이 배우고 뛰어난 사람만 보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선생님 글씨가 워낙 훌륭해서 많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시정잡배나 못배운 사람도 선생님 글을 보고 감명받는 것은 저는 좋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실은 철웅 스님이 소헌 선생에게서 받은 작품을 어느 신도에게 보시(布施)로 내려준 것이 모 다방으로 흘러 들어간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소헌 선생은 그 자리에서 “허 허, 자네 말이 맞네” 하면서 환하게 웃으셨다고 한다」

철웅 스님에게서 생시(生時)에 직접 들었다는 이 일화는 성전암 수선회(修善會)회원인 이동욱(현 동방플랜텍 회장)씨의 전언(傳言)이다.

1971년 봉강연서회 4회전(71.5.13~5.18)이 경북공보관 화랑(구 KG홀)에서 열렸다. 봉강서도회(회장 이수락)가 회원전을 가질 무렵에는 이미 서예가 널리 보급되고 일반의 인식이 크게 향상되어 있었다. 매스컴에서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방송이 이 전시회를 적극적으로 보도하였다. 전시회 도중인 5월 15일에 KBS 대구방송국이 소헌 선생을 초청하여 봉강서도회의 이수락 회장, 박선정 부회장과 함께 매일신문 이태일 문화부 차장의 진행으로 특집 방송을 했다. 이 특집에서 당시 서예 붐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과 서예의 발전 전망에 관하여 다양한 정담(鼎談)을 나누었다. 이는 오전 10시에 생방송되었다.

경북문화상수상기념촬영-다시
소헌 선생이 경북실내체육관에서 열린 경북문화상 시상식에서 미술부문을 수상한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경북문화상 수상 (1971)

1971년은 선생에게 잊지 못할 해이기도 하다. 64세에 경북문화상을 수상하게 된 것이다. 고혈압으로 두 차례나 쓰러지면서도 붓을 놓지 않고 정진했던 덕분이었다고나 할까, 많은 제자를 키우고 이 지역에 서예 붐을 일으킨 공로라고나 할까, 소헌 선생에게는 의미깊은 수상이었다.

당시 해동서화협회는 추천사에서 「소헌은 본회 회원으로 성실하고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이며 서예 수련에 있어서의 그의 강열한 구도정신은 그로 하여금 국전 입상의 경력이 여실히 증명하듯 진(晉)나라의 왕희지(王羲之), 당(唐)나라의 유공권(柳公權), 구양순(歐陽詢), 안진경(安眞卿) 등에서 득력(得力)하게 되었고 나아가 현대의 독자적이고 원숙한 경지를 개척한 서예가(書藝家)로서의 위치를 굳히게 했을 뿐아니라 그가 창립한 봉강서도회(鳳岡書道會)를 통하여 후진 양성에 정진하여 수많은 국전 입선 작가를 낳게하여 명실 공히 향토 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다대(多大)하므로 이번의 경상북도 문화상 미술부문 수상 적격자로 추천하는 바이다」 라고 하였다.

경북문화상의 시상식(1971.5.30)은 경북실내체육관에서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선생은 부자유스러운 몸을 이끌고 가까스로 참석했다. 부축을 받으며 단상에 올라 상패와 금메달을 받으면서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봉강서도회 회원들과 가족들, 의성김씨화수회와 청송파친목회, 해동서화협회 등에서 과분한 축하 꽃다발을 안겨 주었다. 그런가 하면 서울, 부산, 전주, 광주 등지의 김병성, 김성달, 박수석, 윤병문, 나지강, 김교경, 추근봉, 황수연, 이계정, 손복향 씨 등으로 부터 기념품을 전달 받았다.

그러나 마음 한편으로는 부끄러움을 지울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선생을 과분하게 치켜 주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비록 건강이 좋지 않고 나이도 들었지만 더욱 분발하고 최선을 다해 부끄러움을 어내야겠다는 생각에 다소 흥분되기도 했다.

선생은 수상 소감에서 「이 영광을 얻은 것이 기쁘다기보다 송구스러움이 먼저 앞섭니다. 본 도내(道內) 서백(書伯), 화백(畵伯) 중 선진(先進)이 많고 또 저 자신 최근 건강이 여의치 못하여 사도(斯道)의 진흥 발전에 힘답게 기여하지 못하여 항상 염려해오던 차에 무상의 영광을 더하여 주시는 것은 아마 심사위원 제위께서 저를 격려하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서도에 뜻을 둔지 수십년이 되도록 이루어 놓은 것은 하잘 것 없으나 오늘날 복잡한 사회, 삭막한 세정에서 우리 고유의 문화 예술인 서도를 통해 우리의 정신을 안정시키고 정서를 살리는 것은 물론 우리들의 생활에까지 영향을 미칠수 있다는 신념이 있었기에 이 서도를 탐구하였고, 또 후진을 양성하기에 조그마한 힘이라도 기여된 것이 인정되었다면 그 이상 보람있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금번 문화상 수상을 계기로 하여 사도(斯道)에 대한 관심과 책임감을 더욱 뼈저리게 느끼며 일석할 수 있는 힘이 미칠 수 있도록 끝까지 헌신 노력하여 사도(斯道) 발전(發展)에 뜻두신 여러분에 대해 보답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실로 끝없는 탐구자의 자세였다.

◇국전 공정성 시비

이 무렵 국전(國展)은 잦은 잡음을 빚고 있었다. 서예 본연의 외적인 요소가 작용하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그 결과 지방의 출품자들이 소외되기도 했고 납득할 수 없는 수준 미달의 작품이 버젓이 입선되어 전시되기도 했다. 그 해 국전에는 일부 인사의 서풍(書風)이 크게 좌우된 탓으로 전라도와 수도권에서 많이 뽑혔으나 대구 경북에서는 한사람도 입상하지 못했다. 봉강서도회 회원도 10명이나 응모했으나 전부 낙선하였다. 국전이 서예가의 수준 척도로서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당시의 분위기로 타락하는데는 큰 문제가 있었다. 그 때는 국전이 가장 권위 있는 공모전이었을 뿐 아니라 유일한 등용문이었기 때문이다. 선생은 그런 국전 풍토에 대해 착잡한 심정을 참지 못해 12월 10일자 매일신문의 ‘문화계 결산’ 란에 기고를 했다(1971.12.10). 전문(全文)을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1971년 한 해의 개인 서예 발표전은 없었으나 서숙전은 평년 수준이 되었다. 서숙 전시회는 상록(常綠), 난정(蘭亭), 봉강(鳳岡)의 회원전이 있었고, 서(書)와 화(畵)가 공(共)히 전시된 대구(大邱)·부산(釜山)합동전시회는 두 지방의 친선전(親善展)으로 문화예술의 교류라는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국전(國展) 대구순회전은 특선작품 이상 만이 전시되었기에 일반 서예인들에게는 큰 인상을 주지 못했다. 해동서화협회가 주최한 초(初)·중(中)·고(高) 학생 서예실기대회에서 나타난 학생들의 수준 향상은 앞날의 전망을 밝게 해주고 있다. 서예 지도교사가 없는 학교는 전연 참여치 않아 앞으로 각 학교마다 서예과목을 교과목으로 채택하여 그 발전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주부들의 전시회 참여가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다. 주부들의 정신 수양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다.

국전 순회전이 대구에서 일부나마 전시되어 지방 애호가들의 관심을 모은 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서예부문에 있어 국전 심사과정과 그 결과가 우리 지역 서예인에게 의아심을 자아내게 한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대구에서 상당수 수준 이상의 작품이 출품되었는데, 중에는 충분히 특선의 수준의 되는 작품도 있었으나 입선에도 들지 않아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실망을 안겨 주었다. 이는 심사과정에서 편파적이고 일부의 서풍(書風) 만을 내세운다는 인상을 주어 심히 유감스럽게 사료(思料)된다. 이는 필히 시정되어야 하며 올바른 자세로 연구하는 대구 서예인들은 이를 시정하는데 노력을 경주해야 될 것이다」라고 국전 운영에 대한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이의 시정을 촉구했다.

김영태 영남대 명예교수(공학박사,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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