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예찬
커피 예찬
  • 승인 2019.05.28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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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봉조 수필가
갓 볶은 원두 한두 봉지 가방에 넣고 다니면, 시시때때 따뜻한 미소가 그려지고는 한다. 배배꼬인 실타래처럼 쉽게 풀리지 않는 일로 머리가 복잡하다가도, 감미롭게 번져 나오는 향기로 호흡을 하면 어느새 가슴 속 무지개가 환하게 밝아오기 때문이다.

커피와 나의 만남은 반세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책상 위에는 늘 커피가 놓여 있었다. ‘공부를 하기 위해서’라는 핑계였다. 카페인의 각성 효과보다는 처음 느낀 오묘한 맛에 마음을 빼앗겼다는 표현이 옳겠다. 더불어 몇 푼 되지 않던 용돈의 대부분은 커피를 사는데 썼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에 골목골목까지 커피가 침투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소리 없이 커피가 우리 생활 깊숙이 젖어들고 있을 때, 저녁 시간을 이용해 가까운 문화센터에서 바리스타(barista) 과정을 배우며 자격증을 취득한 것이 6년 전 일이었다. 그리고 커피 내리는 기구를 사무실로 옮겨놓고, 핸드드립(hand drip)으로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색다른 시도에 의외로 반기는 사람이 많았다. 주변이 늘 향기로 물들었으니, 직장 분위기도 달라졌다. 초코처럼 달콤하고 중후한 맛, 감귤이나 살구꽃처럼 가볍고 상큼한 맛, 화산재에 그을린 듯 짙고 씁쓰름한 맛도 저마다 매력을 과시한다. 커피의 맛을 결정하는 요소는 여러 가지가 있다. 재배 지역의 토질 또는 가공 과정, 볶는 정도, 커피 가루의 굵기나 커피를 내리는 물의 온도와 시간 등에 따른 차이도 크다. 하지만 마시는 사람의 기분이나 날씨 등 주변 환경이야말로 커피 맛을 좌우하는 무엇보다 큰 변수가 아닐 수 없다.

근대 음악가인 베토벤은 매일 아침 커피 한 잔을 끓이기 위해 원두 60알을 준비하고, 유리로 된 도구로 커피를 추출했다고 한다. 후기 인상파의 쌍벽을 이루었던 화가 고흐와 고갱은 성격이나 취향이 크게 달랐으나, 그들의 아침을 열어준 것 역시 커피였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커피의 맛과 향은 많은 예술가들에게도 특별한 감성과 영감을 불러일으켰음이 분명하다.

누가 뭐라고 해도 커피의 효능은 머리를 맑게 하는 청량제 역할에 있다. 뿐만 아니라 소화제나 각성제 또는 구취제거나 다이어트에도 효과가 있으며, 당뇨 또는 치매 예방, 우울증 완화 등에도 도움이 된다니 적당량의 커피는 보약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그렇게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도 있지만 정서적 작용 또한 중요하다. 포근하게 스며드는 커피 향은 지쳐가는 삶에 쉼표가 되고, 재충전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커피로 인한 부작용 또한 적지 않다. 지나치게 많은 양의 커피를 마시다보면 불면이나 고혈압, 위장병이나 골다공증, 빈혈 등에 노출될 수 있다니, 주의해야할 일이다.

신선한 원두를 갈 때 번지는 향과 커피를 내릴 때 들리는 잔잔한 음악 같은 물소리를 특히 좋아한다. 비가 오면 비가 와서,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불어서, 날씨가 좋을 때나 궂을 때나 커피는 하루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하는 나의 동반자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미당 서정주 시인은 청년시절 ‘자화상’이라는 시를 통해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었다’고 표현했다. 그렇다면 나에게는 어떨까. ‘나의 정신적 성장의 주변에는 언제나 커피가 있었다’고 말하고 싶다. 커피 한 잔의 힘은 어떤 일로 기분이 들떠있거나 누군가가 그리울 때, 우울하고 지치거나 회복이 필요할 때도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갈등을 이겨내는 위로가 되기에 충분하다.

커피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커피의 향과 같은 깊고 온화한 마음의 향기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커피가 아니라 즐겨 찾는 기호품이나 표지가 예쁜 수첩, 깜찍한 돌멩이, 수더분한 나무토막 하나라도 괜찮다. 누군가의 감성을 어루만져주는 정신적 비타민을 가까이할 수 있다면, 삶이 그리 팍팍하지만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오늘도 원두를 사러 길을 나선다. 콧노래가 나오고,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그런 기분을 만끽하는 것이야말로 정신을 풍요롭게 하고, 스트레스를 완화하며, 다른 사람과의 소통과 공감의 범위를 넓히는 영양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복잡하고 어지러운 사회를 무사히 견뎌낼 수 있는 것은 심신의 근육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윤활유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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