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논단>몸은 비록 종(奴)이라 할지라도
<대구논단>몸은 비록 종(奴)이라 할지라도
  • 승인 2010.03.17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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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후섭(아동문학가 · 교육학박사)

제사가 끝난 뒤 그 제상을 그대로 물려서 누구에겐가 다시 제사를 올리는 예를 더러 볼 수 있다.
경주 내남면 이조리 최진립(崔震立, 1568~1636) 장군 문중의 경우, 주인을 따라 장렬히 전사한 하인 옥동(玉洞)과 기별(奇別)을 위해 추모비각도 세우고 해마다 제사를 지낼 때에는 장군의 신위 앞에 올린 제상을 그대로 물려서 두 종에게도 똑같은 절차로 제사를 올린다고 한다. 반상의 구분이 엄격하였던 당시 상황으로 보았을 때 최고의 예우로 생각된다.

최진립 장군은 1636년 병자호란 때에 나이가 칠십임에도 나라를 구하기 위해 경주에서 서울로 달려갔다. 함께 참전한 충청감사 정세규(鄭世規, 1583~1661)가 후방을 지켜 줄 것을 간청하였으나 장군은 비장한 목소리로 “내가 비록 늙어 잘 싸우지는 못할지언정 싸우다가 죽지도 못하겠는가?” 하면서 말을 달려 남한산성으로 진격하던 중, 용인에서 적의 대군을 만나 격전을 벌이게 되었다.

형세가 불리해지자 종들이 물러날 것을 권유하였다. 그래도 장군은 기어이 물러나지 않고 적을 무찔러나갔다. 이에 두 하인도 “주인이 목숨을 버려 충신이 되려는데 어찌 우리들이 충노(忠奴)가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면서 주인을 도와 장렬히 목숨을 바쳤던 것이다. 이에 모두가 그 두 분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경주 양동 마을 경우에도 이와 비슷한 예가 있다. 마을 왼쪽 향단(香壇) 아래쪽에 정충각(旌忠閣)과 충노각(忠奴閣)이라는 비각 둘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비각은 이곳 출신으로 병자호란 때 순절한 낙선당(樂善堂) 손종로(孫宗老, 1598~1636)와 그의 충실한 종(奴) 억부(億夫)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정조(正祖) 때에 임금의 명으로 세워졌다.

낙선당은 이 마을을 개척한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의 현손으로 광해군(光海君) 때에 무과에 합격하여 남포현감(藍浦縣監)을 거쳤는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경기도 이천의 쌍령(雙嶺)전투에 참여하여 종 억부와 함께 전사하였다. 싸움이 얼마나 치열하였던지 끝내 시체를 찾지 못하고 옷가지만으로 장례를 지냈다고 한다.

이에 나라에서는 이 두 사람의 비를 함께 세우게 하였는데 비문은 우승지(右承旨)인 이정규(李鼎揆)에게 짓게 하고, 글씨는 당시 명필이었던 정충필(鄭忠弼)에게 맡겼던 것이다. 안동(安東) 태사묘(太師廟)에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하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태사묘(太師廟)는 고려의 개국공신 김선평, 권행, 장정필 공(公)의 위패를 모셔놓은 곳으로, 이들 세 사람을 일컬어 삼태사(三太師)라고 한다. 태사묘는 역사적으로 볼 때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중대한 역할을 한 인물을 모신 사당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안금이(安金伊)란 사람이 노부모와 어렵게 살면서 이웃 태사묘의 문지기로 일하고 있었는데, 포악한 왜인들이 삼태사의 위패를 가만히 놓아 둘 것 같지 않자, 안금이는 위패를 안고 지금의 임동면 지례리에 있는 국란이라는 곳으로 모시고 난이 끝날 때까지 혼자서 제사를 올렸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고 도망가기 바빴지만, 안금이는 자신의 직분에 충실했던 것이다. 이에 나라에서 벼슬을 내리려 했지만 안금이는 자신의 신분이나 학식이 보잘 것 없음을 들어 거절하고, 오직 문지기 일에만 열성을 다하는 한편, 자신이 죽은 뒤 삼태사의 제상 물려받기만을 희망하였던 것이다.

이에 감동한 나라에서는 안금이가 죽은 후 태사묘 안에 안금이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인 안묘당(安廟堂)을 설치하는 한편, 중추부 정3품 당상관에 해당하는 `첨지(僉知)’ 벼슬을 추증하고, 그의 소원대로 태사묘에서 지낸 제상을 물려 안묘당에서 다시 한 번 제사를 지낸 후 음복을 하게 하였다.

안금이는 현실에서의 호강보다는 죽어서 얻는 명예를 택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사람은 신분에 관계없이 제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존경받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곧 사람의 근본적 본분이기도 하다. 그럼 우리는 과연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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