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창시부터 ‘대구 10월사건’까지…금호강엔 역사가 흐른다
동학 창시부터 ‘대구 10월사건’까지…금호강엔 역사가 흐른다
  • 이대영
  • 승인 2019.06.05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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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서 탄생한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
결혼 뒤 10년간 세상 떠돌다 울산 정착
스승의 현몽·49일 기도로 깨달음 얻어
1861년 구미산 용담서 포덕 시작
미군정 식량정책 반감 커진 대구시민
1946년 10월 결국 대규모 항의 운동
건물 776동 파괴·사망자 2백명 넘어
신택리지-금호강물줄기
역사가 흐르는 금호강 물줄기. 그림 이대영
 

 

이대영의 신대구택리지 - (22)개벽의 틈새를 내는 쐐기버팀목

AD 630년 서라벌(徐羅伐)은 ‘백성의 신음소리 그치는 날이 없었고, 썩지 않는 곳 하나도 없는 나라(沒民聲無日, 不腐處無國)’였다.

왕족으로 태어났기에 국가의 흥망과 생명이 좌우되기에 늘 고민 속에 푹 빠졌다. 동갑내기 스님인 자장율사(慈裝律師)는 ‘세상만사는 마음씀씀이 따라 달라진다(一切唯心造)’는 불경구절을 하나 적어 전해주었던 날 3월 15일 덕만공주(德曼公主)는 달구벌 부인사를 찾았다. 삼천배(三千拜)를 올리면서 축원을 했다. 불전에 머리를 숙였다가 드는 순간 자장율사가 건넸던 메모쪽지를 보자, ‘삼한일통이란 원대한 꿈도 마음씀씀이에 좌우된다고?’ 라는 번갯불과 같은 생각이 스쳤다. 곧바로 요사채로 가 옷고름에다가 바늘로 신라천년(新羅千年)이라고 수를 놓았다. 즉 새로운 천년사직을 펼치자(新羅千年)는 삼한일통의 꿈을 디자인하면서 서라벌로 돌아갔다.

632년에 선덕여왕으로 즉위해 i) 천기(天機)를 엿보고자 첨성대(瞻星臺)와 백성의 일통삼국에 민의결집을 위한 황용사(黃龍寺) 9층탑을 건립하는 등 대형문화프로젝트, ii)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적재적소에 인재등용, 원린근공(遠隣近攻)의 외교정책 등으로 새로운 신라천년의 터전을 다졌다.

고려로 가보자. AD 1202(고려 신종5)년에 무신정권의 혹정에 시달렸던 영천지역농민들이 경주초별군(慶州別抄軍)이라는 이름으로 당시 지명 영주(永州) 오늘날 영천(永川)을 공격했다. 견수(堅守)와 이극인(李克仁)의 정부군에 항복했지만 진압당해 경주로 패주했다가 권토중래를 도모했지만 그것마저 무신정권은 무관용으로 발본색원했다.

이런 호국(護國)의 혼령(魂靈)이 이어내려 와 임진왜란 땐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의승병(義僧兵) 2천명으로 1593년 1월에 명국지원병과 합동작전으로 평양탈환에 참전했다. 4차례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회담을 하면서 각종전황에 대한 첩보(討賊保民事疏)를 국왕에게 올렸고, 동화사 대웅전 봉서루(鳳捿樓)에다가 ‘영남치영아문(嶺南緇營牙門)’을 설치해 승병양성과 의병을 지원했다. 1596년 3월 3일과 9월 28일 지역의병들의 공산산성회맹(公山山城會盟)에 참석해 격려했다.

◇ 탁란모(托卵母)처럼 죽음을 당하기도

두견새나 벙어리뻐꾸기가 휘파람새가 없는 틈에 휘파람새의 알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큰 알을 낳아놓으면 둥지로 돌아온 휘파람새는 작은 자기의 알을 버리고 두견새 혹은 뻐꾸기의 알을 부화하는데 전력을 다한다. 결국은 자신이 까서 키운 두견새나 뻐꾸기로부터 죽음을 당하기도 한다. 이런 현상을 탁란(托卵)이라고 한다. 모성이 강한 암탉의 특성을 지닌 달구벌은 몇 차례 탁란(deposition)으로 위란(危亂)에 처하기도 했다.

달구벌의 탁란현상(deposition)은 일제식민지시대가 한민족의 혼을 일본제국의 혼(和魂)으로 대체하고자 달구벌 특히 달성공원을 부화장(incubator)로 활용했다. 달구벌이 일제의 탁란을 부화시켜 당했던 게 바로 내선일체(內鮮一體), 신사참배(神社參拜), 대동아공영(八紘一宇), 대륙침략병참기지의 뼈아픔이었다. 우리의 고유한 정신과 문화까지 일제혼령에 물들었고, 뼛속깊이 멍들었다.

이런 일제탁란(日帝托卵)에 저항심을 가졌던 지역주민들은 i) 일제 앞잡이 경찰에 대한 반감이 극심했음에도 일제청산은 고사하고, 미 군정청(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이 도리어 그들을 요직에 승진까지 시켜줌에 반감을 가졌다. ii) 식민지일제로부터 새로운 대한민국의 건국을 위한 토지개혁을 제창했지만 식량공급정책을 더욱 강압적으로 시행했던 미군정에 저항감을 가졌다. iii) 일제 대륙병참기지산업에 혹사당했던 근로자가 가장 많았던 이곳은 ‘한반도의 모스크바(Moscow of the Korean Peninsula)’로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이 침투, 물들어갔다. iv) 1946년 대구·경북지역에 식량부족(쌀 배급정책 실패)이 극심한데다가 설상가상으로 콜레라 전염병으로 2천여 명이나 죽어나갔기에 민심은 극도로 치솟았다. 이에 철저한 방역을 위해 대구를 주변지역과 완전히 고립봉쇄시켰다. v) 여기에다가 9월 23일 전국근로평의회 총파업결정에 따라 9월 25일 대구우체국 460명 파업, 9월 26일에 40여 개 노조가 총파업을 결행했다. 누란지위(累卵之危)의 대구는 방귀 잦으면 똥 싼다(If you fart more often, you shit)는 속된말처럼 결국은 10월1일 사건이 터졌다. 주한미군의 ‘대구 10월사건’ 결과에 대한 정보보고서(G-2 보고서)에 의하면 대구경찰 38명, 공무원 163명, 민간인 73명이 사망했고, 부상자 1천여명, 행방불명 30명, 시위혐의자 7천400명이었으며, 776동의 건물이 파괴되었다.

◇ 동학,‘백성이 곧 하늘’ 이라는 민주배아를 형성

하늘은 대임(大任)을 맡기기 전에 심신을 단련시킨다. 최수운(崔水雲)의 부친 근암공 최옥(1762~1840)은 참으로 기구한 운명을 타고 났다. 2번이나 상처(喪妻)하고 3번이나 결혼을 해야 하는 불운을 당했다. 1779년 17세에 오천정씨, 1799년 37세 땐 달성서씨, 1812년 50세에는 곡산한씨 아내를 맞이하는 운명이었다. 1824년 10월 28일 63세 근안공(近庵公)의 3번째 부인으로부터 새벽 동이 틀 무렵에 귀미산(龜尾山)에 기묘한 소리가 울렸으니 이날 사내아이의 고고지성(呱呱之聲)으로 최제우(崔濟愚)가 탄생했다.

오늘날 주소론 경주(慶州) 현곡면(見谷面) 가정리(稼亭里) 315번지, 그의 생가 터는 1834(癸卯)년 2월에 화재로 전소되었으며, 현재는 1971년 10월 28일 교도들이 구입해 조경과 유허비(遺墟碑)를 세웠다. 아명(兒名)은 천하지만 무병장수하라는 의미에서 삽삽개의 별명인 ‘복술(福述)’이라고 했다. 자(字)는 도언(道彦) 혹은 성묵, 본명은 제선(濟宣), 1859년 10월 이후에는 누군가 붙였는지 ‘세상의 어리석음을 구제한다’는‘제우(濟愚)’와 호(號) ‘수운(水雲)’이라고 불렸다. 1862년 선전관 정운구(鄭雲龜)의 장계(狀啓)에선 ‘복술(福述)’로 경상감사 서헌순(徐憲淳)의 장계에도 ‘복술(福述)’로 적혀 있었다.

사서삼경의 하나인 맹자에서는 ‘하늘이 장차 어떤 사람에게 큰일을 맡기려 할 때에는 i) 반드시 가장 먼저 그의 마음 혹은 뜻을 뒤흔들어 고민하게 하며, ii) 신체적 질환으로 근골을 힘들게 하고, iii) 경제적 곤궁에 빠뜨려서 배고픔의 슬픔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다. iv) 뿐만 아니라 그가 하는 일마다 어긋나고 뒤틀리게 하는데, v) 이렇게 함으로서 흔들리는 마음을 굳게 다잡고, 견뎌내어 성정(性情)을 강인하게 함이며, vi) 부족한 능력을 키워서 어떤 상황에서도 극복하도록 함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 또 다른 하나를 추가한다면 아마도 ‘성공하려면 고향을 떠나라’라는 말이 있다. 왜냐하면 ‘동네 점바치 용한 줄 모른다’라는 우리속담이 적용된다.

한편, 최복술(崔福述)은 1844년 19세 밀양박씨(密陽朴氏)와 결혼을 했고, 10년간 장삿길을 떠났다. 대략 10여 일간 장사로 한 달에 2번 정도 장사를 했다. 그에게 장사는 세상(民心)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수도(修道)였다. 동경대전(東經大典)에선 ‘방방곡곡 다니면서 생생한 현장을 마음속에 그렸고, 산마다 물결마다 낱낱이 깨달았다’고 적었다. 10년간 세상구경을 마치고, 1854년 10월 부인의 고향인 울산의 야시바위골(狐岩谷)에 6 두락의 전답을 마련하고 농사를 지었고, 정착함으로써 구도의 길에 접어들었다. 1855(乙卯)년 3월에 스승님으로 신묘한 책 한 권을 전수받는 현몽을 얻었다. 1856년에 천성산내원암(千聖山內院庵)에서 기도, 1857년에 적멸암(寂滅庵)에서 49일기도를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 정진(精進)을 계속하다가 1861년 6월 구미산 용담(龜尾山 龍潭)에서 포덕(布德)을 시작했다.

세상에 덕행을 펼친다는 의미에서 포덕(布德)은 누구든지 쉽게 접할 수 있는 가사(歌詞)에 가르침을 실었다. 용담포덕에서 9편의 가사를 모아서 1881(고종18)년 6월에 최시형(崔時亨)이 여규덕(呂圭德)의 집에서 편집했던 ‘용담유사(龍潭遺詞)’는 포교 가사집(1824~1863)이었다.

주요내용은 i) 1860년 수은선생이 득도하여 지었다는 가사 용담가(龍潭歌), ii) 불안한 사회의 부녀자들을 안심시켰던 안심가(安心歌), iii) 교도들에게 수도에 전력(全力)을 다하라는 교훈가(敎訓歌), iv) 꿈속문답을 통해서 자신의 득도과정을 읊은 몽중노소문답가(夢中老少問答歌), v) 1861년 제자들에게 수도에 전념을 당부하는 도수사(道修詞), vi) 동학으로 동귀일체(同歸一體)를 권하는 권학가(勸學歌), vii) 1863년 도덕과 하늘을 경외하는 소중함을 담은 도덕가(道德歌), viii) 1863년 도는 사람 가까운 곳(道不遠人)에 있다는 흥비가(興比歌)와 ix) 일본 오륜서(五輪書)를 남긴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는 “내 칼은 사람을 베기 위한 게 아니라 내면의 탐욕을 베고 하늘의 기운을 받고자 함이다”라고 했고 조선선비 남명 조식(南冥曺植, 1501~1572)은 “자신의 사악함을 자르겠다(劍斷邪惡)”고 늘 칼을 차고 다녔던 문신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1861년 수은선생이 전북(全北) 남원(南原) 선국사(善國寺) 은적암(隱蹟庵)에서 “자신의 사악한 마음을 자르겠다”고 “용천검 드는 칼을 아니 쓰고 무엇 하리?(龍泉利劒不用何爲)”라는 가사가 들어 있는 ‘칼의 노래(劍訣)’를 지었다.

이 칼의 노래는 참형을 불러들이는 화근이 되었다. 나중에 1892년 음력11월 교조신원(敎祖伸寃)을 명분으로 전북 완주군 삼례읍(參禮邑)에 모인 동학교도들이 검결(劍訣)을 노래하면서 집단검무(集團劍舞)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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