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봉 논란'속 조선의용대 마지막 분대장 '김학철' 재조명
'김원봉 논란'속 조선의용대 마지막 분대장 '김학철' 재조명
  • 최대억
  • 승인 2019.06.09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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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김일성·모택동 1인 독재·우상화 비판한 '쓰는 자(記者)'로 평가

61년전 북한의 김일성을 비판하다 숙청되기 전, 항일 무장독립투쟁가로 해방 이후 남쪽에 들어왔다가 월북해 북한에서 고위직을 지낸 약산 김원봉에게 서훈을 해야 한다는 글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오면서, 김일성 1인 독재와 우상화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다 중국으로 망명한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동지였던 기자출신 김학철(조선족)이 재조명되고 있다.

함경남도 원산이 고향인 김학철은 일제강점기인 1941년 무장 독립운동단체인 조선의용대 분대장으로 중국 하북성 태항산 전투에서 왼쪽 다리에 총상을 입고 포로가 돼 일본 형무소에 수감됐다.

독립군으로 활약한 조선의용대는 밀양 출신의 김원봉과 윤세주가 활약한 부대로 알려져 있으며, 김원봉과 윤세주는 조선의용대에서 김학철의 상관이자 동료였고, 김학철은 태항산 전투에서 분대장을 맡았다.

김학철은 광복 이후 서울로 돌아와 1945년 단편소설 '지네'를 발표하면서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던 중 이승만 정권에 반발, 사회주의자가 돼 북한으로 들어가 노동신문 기자로 일하면서 김일성 우상화와 독제체제를 비판하다 또 다시 중국으로 망명했으며, 중국에서는 소설가로 활동하면서 모택동과 문화혁명을 비판했다가 옥고를 치르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남한으로부터는 월북과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로 버림 받았고, 북한과 중국으로부터는 김일성·모택통 체제를 비판했다가 홀대를 당했다.

김학철은 일본 투옥 중 총상을 당한 허벅지를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 다리를 하나 절단한 채 50여년째 한국과 북한, 중국 그 어느 정권으로부터도 환영 받지 못한 삶을 살다가 2001년 9월 중국 연변에서 병사했다.

중국 재북경화룡시출향인협회 최영광(52·조선족)이사는 "그의 파란만장한 삶에는 식민지, 광복, 분단으로 굴곡진 한국 현대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면서 "남한·북한·중국 세 나라에서 우상화된 1인 독재에 항거한 독립운동가 출신의 쓰는 자, 즉 기자(記者)였음은 민족주의자나 자본·사회주의자를 막론하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한편, 김학철의 동지였던 김원봉은 그동안 국민청원 게시판에 '김원봉 서훈' 등을 촉구하는 글이 다수 올라왔었지만, 수천 건 이상의 '청원동의'를 얻어낸 건 이번이 처음이다.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지난 7일 '약산 김원봉에게 독립유공자 서훈을 수여해 주십시오'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이 글은 "약산 김원봉은 항일무장투쟁의 상징이었다. 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독립투사 중 한 명"이라며 "월북한 사실이 논란이 되고 있지만, 그가 김일성을 좋아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음은 잘 알려져 있다"고 주장했다.

또 "김원봉이 이끈 의열단의 활약과 조선의용대의 무장투쟁은 광복군의 한 축이 됐고, 오늘날 국군의 동력으로 이어졌다"며 "반드시 서훈이 제대로 이뤄지고 역사가 재평가돼야 불행했던 과거가 되풀이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서울=최대억기자 cde@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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