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 산물’ 서예 상품화에 탄식
‘정신의 산물’ 서예 상품화에 탄식
  • 김영태
  • 승인 2019.06.10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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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글씨 대가로 지필묵 선물
작품에 값을 매기다니 못마땅
제자에 추사 驥號仙人 일화 전해
꿈에서 김정희, 한석봉 만나고
글씨쓰기의 근본자세 재확인
“신운은 점과 획 가운데 잠기고
글자 만드는 사이에 붙어 있다
이는 정신으로 쓰는 걸 말한다”
소헌선생-맹호출림
소헌 선생이 남긴 유일한 호랑이 그림 「맹호출림(猛虎出林)」 1974.

 

소헌 김만호의 예술세계를 찾아서 (19)-장년시절 10. 1971(64세)

◇기호선인(騎虎仙人)

1960년대가 지나고 70년대에 접어들면서 우리의 경제는 급속히 성장되어 이미 중진국 대열에 접어들었다. 식량이 자급자족되고 경부고속도로가 개통(1970)되어 전국이 일일생활권이 되었다. 공업화의 추진으로 수출액 10억불을 달성하고 국민소득이 증가했다.

1971년에는 농촌에 새마을운동이 일어나 도시, 직장 새마을운동으로 확대되어 국민들에게 조국 선진화의 의지를 심어준 토대가 되었다.

70년대의 경이적인 경제발전은 생활의 안정과 함께 문화계에도 작가들의 예술 활동에 변화가 왔다. 예술작품의 상품화 현상이 일고 있었던 것이다. 서예계에도 예외없이 상혼이 깃들어 상품화 바람이 불고 있었다. 작품이 팔리고 작가가 돈을 번다는 것은 좋은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헌 선생의 생각은 좀 달랐다. 사람의 인격과 정신이 담긴 서예작품에 값을 매긴다는 것이 온당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더구나 일부 서예가들이 인격과 정신을 제쳐놓고 팔기 위해 같은 작품을 여러 개 만들어 내놓는 것은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당시의 심정을 소헌 선생은 매일신문 「나의 회고(回顧)/16」(1987.9.11)에서 다음과 같이 소회를 밝혔다.

「나는 그 무렵 서예작품의 상품화 현상에 대해 못마땅하다는 이아기를 자주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혹자는 나를 고루하다고 했을지 모르지만 서도의 근본정신을 져버려서는 안된다는 소신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내가 어렸을 때는 글씨를 받으러 가려면 지필묵(紙筆墨)을 사서 준비해가는 것이 통례(通禮)였다. 그것이 글씨에 대한 대가(代價)였던 것이다. 세상이 변했다고 해도 서예작품에 가격을 매긴다는 것은 도무지 못마땅해서 열을 올리곤 했다. 그리고 나는 제자들에게 추사(秋史)의 일화(逸話) ‘기호선인(騎虎仙人)’을 인용하여 말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추사(秋史)를 보고 글을 써 달라고 아무리 졸라도 잘 써주지 않자 주위에서는 뭐 그렇게 힘드는 일이라고 하며 추사(秋史)를 못마땅해 했는데 추사(秋史)의 제자가 말하기를 ‘추사(秋史) 선생은 기호선인(騎虎仙人)과 같다’라고 했다는 얘기를 해 주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기호선인(騎虎仙人)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숲속 길을 가던 촌부(村夫)가 호랑이와 마주쳤다. 호랑이도 촌부도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펄쩍 뛰는 바람에 촌부가 호랑이의 등에 얹히게 됐다. 호랑이는 더욱 놀라 촌부를 태운채 들로 산으로 동리로 내달렸다. 동리 사람들은 처음엔 무서워 도망치다가 이 광경을 보고 호랑이 등에 올라탄 촌부가 장하고 대단하다고 박수를 치며 재미있어 했다. 그러나 촌부의 입장에서 보면 사정이 사뭇 다르다. 그는 생사(生死)의 기로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있었던 것인데 남들은 호랑이 등에 타고 있는 그를 보고 여유로운 신선(神仙)이라고 했다”. 이 일화는 결국 추사(秋史) 선생이 절대절명(絶對絶命)의 정신에서 글씨를 쓰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소헌선생-필묵연
소헌 선생이 썼던 필묵연(筆墨硯). 소헌미술관 소장

◇추사(秋史) 석봉(石峯) 현몽

서도(書道)의 비상(飛翔)에 대한 염원은 소헌 선생 일생의 큰 화두였다. 물론 서도인이라면 누구라도 그러할 것이지만 선생에게는 더욱 큰 무게로 다가왔다. 선생의 서도가 개인 차원을 넘어 제자들로까지 이어진다는 책임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추사(秋史) 석봉(石峯)을 현몽한 일도 그런 정신의 결과였을 것이다. 1971년이 막 저물어가는 12월 31일 제야(除夜)의 밤이었다. 붓을 잡은 채 선생은 깜박 잠이 들었는데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선생과 석봉(石峯) 한 호(韓 護) 선생을 꿈에서 보게 됐다. 평소에 존경해 왔던 두 분을 현몽(現夢)하게 된 것이다. 그 잠깐 동안의 잠은 하나의 계시(啓示)였다. 불꽃같은 정진은 비상(飛翔)의 새 경지를 스스로 불러 온 것이다. 너무나도 뚜렷했던 그 경험을 선생은 비망록에 소상히 적어 놓았다.

「1971년 신해(辛亥) 12월 31일 제야몽(除夜夢)에 김추사(秋史), 한석봉(韓石峯) 양 선생이 현몽(現夢)하시어 정의관(正衣冠) 상좌(上座)하여 위왈(謂曰) 오(吾) 양인목전(兩人目前)에 서초천자문일권(書草千字文一卷)이어늘 즉석(卽席)에서 일필서지(一筆書之)하니 양선생 왈(曰) 근필성공(勤必成功)이니라 하시고 기이출문(起而出門)하시더라. 몽견(夢見) 추사(秋史)선생은 신장(身長)이 6척이오 삼각장발(三角長髮) 면장융준(面長隆準)하여 위엄(威嚴)이 있었고, 석봉(石峯)선생은 신장(身長)이 5척5치 가량이요 안면사각(顔面四角) 황색(黃色)이라 후덕(厚德)하여 보이시더라」. 그런데 현몽 후 며칠되지 않은 이듬해 정월 보름날(1972.1.15) 다시 두분 선생의 꿈을 꾸게 되었다. 역시 이렇게 적혀 있다.

「임자(壬子) 정월 15일에 김추사(金秋史), 한석봉(韓石峯) 양선생 재현몽(再現夢). 위왈(謂曰) “오지제력(五指齊力)이라야 만호제력(萬毫齊力)이니라. 만호제력(萬毫齊力)이라야 서력생동(書力生動)이라, 주완접신( 腕接神)이라야 서내경인구괄(書乃驚人久 )이니라. 호불제력(毫不齊力)이면 획불면교(劃不免巧)요 필불접신(筆不接神)이면 서불경인(書不驚人)이니라” 하셨다」

꿈 속의 두 선생에게서 받은 너무나 분명하고 강열한 계시를 소헌 선생은

「많이 쓰고 또 많이 써서 교(巧)를 부리지 말 것이며 사람으로 하여금 경탄(驚歎)케 하려면 신운(神韻)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일 것인저 주야(晝夜)로 서도에 몰두하다 보니 나타난 환상(幻想)이거늘 생각하면서도 너무나도 석연(釋然)한 현실같은 꿈인지라 잊어버릴 수가 없구나」라고 비망록에 기록했다.

“그렇다! 바로 이것이다! 주완접신(腕接神)! 신운(神韻)을 살리는 거다! 그것이 바로 내 작품에 내 정신을 살아 용틀임하게 불어넣는 길이다. 추사(秋史) 선생도 근필성공(勤必成功)이라 나를 깨우치지 않았느냐? 자 붓을 다시 잡자” 선생은 먹을 갈아서 화선지에 이렇게 운필(運筆)했다.

「神韻 執之無形 聽之無聲/ 潛於默之中 寫乎結構之間/ 動輒與人觀感 吸人之力/ 流傳後世非神韻 不可久傳/ 知功力之淺 稱修養之有等/ 神韻 在於剛柔 儒雅醜娟/ 建勁使轉絲牽 映帶燥濕肥衰長短/ 以神騰格 以韻彰行 書中至寶/ 以神韻 觀作者之 快情故」라는 글문이다.

해석하면 「신운(神韻)은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는 것이다. 점(點)과 획(劃) 가운데 잠기고 글자 만드는 그 사이에 붙어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을 끄는 힘과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신운(神韻)은 글씨가 강함과 부드러움에 들어있어 우아하며 거칠고도 아름답고 눌렀다가 가늘었다가 길었다가 짧았다가 해야 하는데 다시 말해 이는 정신으로 쓰는 것을 말한다. 신운(神韻)은 신(神)으로서 격(格)을 이기고 운치(韻致)로서 글줄을 빛나게 하므로 신운(神韻)으로서 작자의 심정을 엿볼수 있는 것이다」

소헌 선생은 글씨는 손과 붓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의지(意志)와 참 자기정신(自己精神)으로 쓰는 것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했다. 연전(年前)의 모진 병고(病苦)로 인해 잘 움직여지지 않는 왼쪽 손을 보면서 선생은 하늘이 이 왼손을 통해서 ‘서(書)는 정신(精神)으로 쓰는 것’이라는 깨달음으로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참 정신을 작품으로 형상화하는 일념으로 밤마다 서실에 불을 밝히며 지새웠다. 불꽃같은 정진(精進) 고행(苦行)은 비상(飛翔)의 새 경지(境地)를 불러 온 것이다. 은은한 향(香)을 내뿜으며 먹(墨)이 닳을 때마다 거기에 비례하여 더 높은 서도의 유현(幽玄)한 희열(喜悅)로 다가왔다. 그것은 구도자(求道者) 만이 감지할 수 있는 고행(苦行)의 환희(歡喜)였을 것이다.

김영태 영남대 명예교수(공학박사,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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