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꽃 피기를 기다려
비꽃 피기를 기다려
  • 승인 2019.06.1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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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오랜 봄가뭄으로 꽃가루와 섞인 먼지들이 카펫처럼 온누리에 깔려있다. 걸음을 뗄 때마다 풀썩 흙바람을 일으키며 들썩인다. 지붕위에도, 텃밭 상추에도 감나무이파리에도 그리고 내 마음에도. 옥상에 널어놓은 이불을 빨랫줄에서 걷어내니 황사와 함께 노란 꽃가루가 유성처럼 쏟아져 내린다.

옥상에 서서 화단의 꽃들 위로 부챗살처럼 펼쳐지는 스프링클러의 향연을 본다. 타는 목마름으로 시들어가는 빨간 덩굴장미와 햇빛을 보면 활짝 피었다가 밤이 되면 오므라든다고 해서 요술꽃 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송엽국, 잎에서 3가지 색을 볼 수 있는 즐거움을 선사해주는 삼색조팝, 밤에 활짝 피는 달맞이꽃과는 달리 낮에 활짝 피는 낮달맞이, 사랑초 등, 6월의 꽃들 사이사이로 숨어든 물의 향연 때문에 꽃주름이 펴지며 화색이 돈다. 스프링클러의 물줄기가 슬레이트 지붕의 S 골을 타고 내려와 처마 끝으로 떨어져 내리는 빗방울 같다.

수돗물이 귀하던 시절, 우물가에서 마중물을 붓고 두레박으로 샘물을 퍼 올려 빨래를 하고 설거지를 하던 때가 있었다. 그 시절, 빗물은 하늘이 피워낸 비꽃이었다. 그릇의 크기와 종류, 지붕과 마당의 깊이와 넓이 따라 떨어져 담기는 비의 발걸음 소리는 리듬과 신명이 뛰어난 난타 공연이었다. 세상이란 무대와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의 상호성이 어우러진 비의 퍼포먼스였다. 한 방울이라도 놓칠세라 낮은 지붕 아래, 붉은 고무함지박이며 스테인리스 양푼이, 물바가지, 찌그러진 대야 등 비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란 그릇은 모두 나와 처마 밑 펑퍼짐하게 퍼질어 앉아 받은 빗물을 그날만큼은 풍족하게 썼던 기억이 부표처럼 떠오른다.

빨래는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고도 맘껏 헹궈낼 수 있었고 빗물로 감은 머릿결은 미끄럼틀처럼 쓱 단번에 빗겨져서 좋았다. 비 한줄기 그었을 뿐인데 늘 보던 풍경은 달라 보였다. 간혹, 채찍비 같은 강한 비의 느낌표들을 죽비처럼 가슴 안으로 들이던 날이면 가장 가까이 있되 그 누구보다도 낯설기만 했던 내면의 나와 조우하는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남녘으로부터 날아들 비를 기다리며 서 있는 무체색의 내 의식이 조금씩 초록으로 물들어 간다. 만개한 스프링클러 사이로 무지개가 뜬다. 요즈음 목욕탕에서는 물을 잠그지 않은 채 바닥에 철철 넘치도록 틀어놓고 사용하는 사람들을 자주 접한다. 그럴 때마다 ‘물 스트레스 국가’처럼 우리도 곧 물 부족이 현실이 될 것 같은 두려움이 인다. 삼면이 바다며 거미줄 같이 강이 흐르고 비도 많이 오는 나라,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펑펑 나오는 세상에 살다보니 극심한 가뭄으로 땅도, 마음도 병이든 지구 어딘가의 아이들을 얼마나 이해하며 품어 안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레인메이커(rainmaker)’를 불러본다.

‘레인메이커’는 기우제(祈雨祭)를 드리는 아메리카 인디언들로부터 유래된 것으로, ‘비를 부르는 사람’이란 말이다. 기우제를 지내는 기우사를 뜻한다. 하늘에 제사를 올려 단비를 청하는 사람으로 가뭄 때, 들판에 홀로 나가 열정적으로 춤추고 노래하며 비를 기원했다고 한다. 다른 부족이 보기에 그들의 이런 행동은 구름을 모으고 생명의 단비를 내려주게 만드는 마법과도 같았을 것이다. 레인메이커가 기우제를 드리면 반드시 비가 왔다고 한다. 비가 올 때까지 멈추지 않고 지냈으므로 100% 비가 내리는 기우제였다고 한다.

“(...)/ 투닥, 투두닥/ 눈먼 침쟁이 경락을 누르듯/ 억수 비가 떨어지면/ 마당엔 키 작아 걷지 못한 빨래가 젖고/ 낙숫물 깊게 패인 처마 밑으론/ 벌건 쇳물이 분탕질하는 집/ 한 해 잘 버티고 나면/ (...)/ 지금은 소리 소문 없이 사그라진 양철집”

백현국 시인의 ‘사그라지다’를 한 차례 마음속으로 읊조려본다. 연둣빛 어린것들을 만나고 오는 동안 바람도 마음이 순해졌기 때문이었을까. 비가 오는 날은 민들레 홀씨도 앉아서 쉬는 법인지 어린나무며 꽃잎들 사이를 지나온 바람이 부드럽게 뺨에 닿는 계절이다. 이마 위로 빗방울 하나가 떨어져 내린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본다. 비꽃이 피려나 보다. 대지를 토닥여 주는 비의 손길처럼 메말라가는 내 맘에도 단비처럼 비꽃이 피었으면 좋겠다. 우리들의 삶에 따뜻한 악수를 건네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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