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안이용소’, 중·노년 남성들 ‘추억의 아지트’
‘정안이용소’, 중·노년 남성들 ‘추억의 아지트’
  • 이아람
  • 승인 2019.06.10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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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여 년 노하우로 머리 손질
‘4천 원’ 가격에 멀리서도 와
열다섯 살 때부터 이발 배워
거품 묻힌 옛날식 면도도 해
“이용소 명맥 끊기는게 아쉬워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일”
정안이용소
문동식(80) 정안이용소 사장이 손님 머리카락을 이발하는 모습.

 

<착한가격 이 업소> 중구 공평동 ‘정안이용소’

지난 8일 오전 대구 중구 공평네거리 모퉁이에 있는 정안이용소. 경사가 진 계단을 조심스럽게 내려가니 지하 매장 특유의 메케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빗방울이 바람에 휘날리는 궂은 날씨에도 이발을 하기 위해 몰려든 손님들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낡은 전단과 오래된 TV, 철 지난 잡지 등이 향수를 자극한 듯 손님들은 대기석에 앉아 조용히 양손을 모으고 눈을 감은 채 차례를 기다렸다. 천장에는 산뜻한 느낌을 주는 꽃무늬 벽지가 잘 발려져 있었고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추억의 사연과 노래들은 기분을 편안하게 했다.

햇빛 한줌 들어오지 않는 어둑한 실내 분위기와는 달리 넥타이에 정장을 말끔히 차려입은 문동식(80) 사장에게 눈길이 갔다. 문 사장은 손님들의 머리카락을 자르다가도 이따금씩 울리는 전화 수신음에 차분히 발걸음을 옮겼다.

문 사장은 “가게가 지하에 있어 처음오는 손님들은 잘 못 찾는다”며 손님들에게 양해를 구하곤 수화기를 받아 부드럽게 응대했다.

문 사장의 정안이용소는 중구에서만 52년간 운영 중이다. 지하에 자리를 잡은 것은 36년 전이다. 4천 원에 불과한 저렴한 이발 비용에 경북지역, 대구 칠곡·월배 등 다소 먼 곳에까지 입소문을 타 직장을 은퇴한 중·노년 남성들이 친구들과 함께 옛 추억을 곱씹는 곳으로 유명하다.

정안이용소-개수대
정안이용소 세면대. 거울 뒤로 대기하는 손님들이 보인다.

40년 단골인 정남두(82·남구 대명동)씨는 “중앙도서관에서 근무할 적부터 여기만 다녔다. 문 사장이 매우 친절한데다 손님 입맛대로 머리카락을 잘라 주기 때문에 언제나 결과물이 마음에 든다”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문 사장은 열다섯 살 때부터 이발 기술을 배웠다. 경력을 따지면 족히 60년은 넘는 이발 장인이다. 따뜻한 수건으로 얼굴을 감싼 뒤 솔에 거품을 묻혀 잘 벼린 면도칼로 수염을 잘라내는 옛날식 면도도 이곳에서는 가능하다.

문 사장은 경기도 오산이 고향이다. 10대 때 정형외과에서 잠깐 일한 적도 있으나 피를 보는 일이 익숙지 않았다. 그러던 중 하얀 가운을 입고 신사답게 고객을 응대하는 이발사의 모습을 동경하게 되면서 그 길로 이용소 보조로 취직했다. 당시 기술을 전수 받는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손님 머리 감기기, 선배들 양말 빨기부터 시작해서 때로는 이유없이 구타도 당했다. 하지만 미용일을 배우고 싶다는 일념으로 버텨냈다. 스스로 고생길을 열었기 때문에 남에게 한탄할 여유도 없었다. 모진 시간들을 버텨내고 마침내 대구지역에 정안이용소를 열었을 때 문 사장은 “날아가는 기분이었다”고 회상했다.

정안이용소는 벽지, 전단, 인테리어 하나 문 사장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지금은 오래된 라디오 등도 단골손님들의 애정어린 선물이다. 손님들이 앉은 40년 된 의자는 문 사장이 시간 날 때마다 기름칠을 하고 닦아 새 것 같은 골동품처럼 보인다. 지하실 습기로 인해 손님이 불쾌해 할까봐 숯 장식도 들였다.
 

정안이용소전경
대구 중구 공평네거리 모퉁이에 있는 정안이용소 전경.

그는 “요즘 미용실은 하나같이 깨끗하고 화려해서 사실 나도 따라가보려고 시도를 하긴 했다”며 “하지만 손님들이 지금 분위기가 고풍스럽다고 더 좋아해서 리모델링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욕심 없어 보이는 문 사장도 고민은 있다. 이용소의 명맥이 끊겨가는 것이 안타깝다는 것. 지금은 이용소 일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나마 남아있는 이용소도 사장들이 70~80대여서 건강, 사망 등 이유로 곧 없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문 사장은 “미용실은 젊은 트렌드에 맞춰 늘어나고 또 진화하고 있지만 전통을 고수하는 이용소는 쇠퇴하고 있다”며 “그게 가장 안타깝다. 이용소만의 매력을 알고 전통을 유지하려는 젊은이들이 나타났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그는 오랫동안 정안이용소를 잊지 않고 찾아준 단골손님들을 위해서라도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이발 일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문 사장은 “20대 때부터 이용소를 운영하다 보니 단골손님들도 90세를 넘겨 오래된 친구처럼 지내고 있다”며 “언제나 우리 이용소를 찾는 고객에게 청결한 서비스와 신사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웃어 보였다.

정안이용소 주소: 대구 중구 공평로 71(공평동 97-1), 문의: 053-424-3974, 영업: 오전 9시~오후 8시(매주 화요일 휴무).

이아람기자 aram@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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