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와 '동지'로 함께 한 47년…마지막까지 재야 '정신적 지주'
DJ와 '동지'로 함께 한 47년…마지막까지 재야 '정신적 지주'
  • 승인 2019.06.11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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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前대통령 헌신적 뒷바라지…스스로가 주체적 민주화 운동가
'동교동 교도소'서 마음고생…양심수 석방운동 앞장
靑 입성 후 소외계층 위해 노력…말년에도 '동교동계' 구심점 역할
이희호 여사 김대중후보 지원 연설평민당 김대중 후보의 제주 유세에서 김후보의 부인인 이희호 여사가 지원 연설을 하며 여성 유권자들의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1987.12.1  연합뉴스
이희호 여사 김대중후보 지원 연설 평민당 김대중 후보의 제주 유세에서 김후보의 부인인 이희호 여사가 지원 연설을 하며 여성 유권자들의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1987.12.1 연합뉴스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77년 부인 이희호 여사에게 보낸 옥중 편지에서 "우리는 사적으로는 가족 관계지만 정신적으로는 같은 세계를 살아가는 동행자 간"이라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또 1983년 미국 망명 시절 강연에서 "아내가 없었더라면 내가 오늘날 무엇이 됐을지 상상도 할 수 없다"고 회고했다.

이 여사 곁에서 그의 인생역정을 지켜봐 온 사람들은 '김대중의 삶이 곧 이희호의 삶이었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이 여사는 스스로 주체적인 여성 운동가이자 민주화 운동가였으며, 김 전 대통령의 둘도 없는 '동지'이기도 했다.

1922년생으로 김 전 대통령보다 두 살 많은 이 여사는 1950년대 초 서울대 사범대를 졸업하고 미국 스캐릿 대학에서 사회학 석사학위를 받은 당대 엘리트 여성이었다.

이 여사는 마흔 살이었던 1962년 대한 YWCA 총무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도중 김 전 대통령과 혼인했다. 결혼한 지 불과 열흘 후 김 전 대통령이 반혁명을 죄목으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됐으니 이 여사에게는 '고난'의 시작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김 전 대통령이 이듬해 서울 마포구 동교동으로 이사하면서 대문에 '김대중', '이희호'라고 적힌 명패 두 개를 나란히 내건 것은 잘 알려진 얘기다. 김 전 대통령은 감사와 존경의 뜻으로 당시로선 파격적인 '커플 명패'를 달았다고 밝힌 바 있다.

두 사람은 늘 높임말을 쓰는 등 서로를 존중했다.

국기에 대해 경례하는 김대중 대통령 내외김대중 대통령과 부인 이희호 여사가 여의도 국회의사당앞 광장에서 열린 제15대 대통령 취임식장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1998.2.25
국기에 대해 경례하는 김대중 대통령 내외 김대중 대통령과 부인 이희호 여사가 여의도 국회의사당앞 광장에서 열린 제15대 대통령 취임식장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1998.2.25   연합뉴스 

 

1963년 6대 총선에서 '최대 격전지'인 목포에 출마해 극적으로 당선한 것을 시작으로 박정희·전두환 독재정권과의 투쟁 선봉에 선 정치인 김 전 대통령 뒤엔 언제나 이 여사의 헌신적인 뒷바라지가 있었다.

선거 때마다 이 여사는 '남편이 1진이라면 나는 2진'이라면서 김 전 대통령이 일일이 챙기지 못하는 골목을 누비고 발품을 팔아 '부창부수'라는 칭송을 들었다.

정책 제안의 바탕이 되는 꼼꼼한 신문 스크랩도 이 여사의 몫이었다.

김 전 대통령이 1970년대 초 유신 반대 투쟁에 앞장섰을 때 '더 강력한 투쟁을 하시라'고 남편을 독려하는 등 강골의 운동가 기질을 발휘하기도 했다.

이 여사는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김 전 대통령과 함께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사흘 만에 풀려난 이 여사는 다른 3·1 사건 구속자 가족들과 양심수 가족협의회를 결성해 석방 운동에 앞장섰다.

김 전 대통령의 첫 재판 때 검정 테이프를 입에 붙이고 침묵시위를 하던 사진은 고된 옥바라지 속에서도 의연한 모습을 보이던 이 여사를 기억하는 역사의 기록으로 남았다.

1978년 연말 석방된 김 전 대통령은 수차례 반복된 가택 연금으로 '동교동 교도소'라고 불리던 자택에 발이 묶였다가 1980년 5월 17일 또다시 연행됐다. 신군부의 5·18 광주 학살과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의 서막이었다.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이 1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던 무렵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질 정도로 마음고생을 했고, 지독한 관절염까지 얻었다.

 그런 와중에도 옥중의 김 전 대통령에게 600권이 넘는 책을 보내 공부를 돕는가 하면 청와대 안가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과 독대해 남편의 석방을 당당히 요구했다.

 1982년 말 미국으로 망명한 김 전 대통령과 이 여사는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대학과 교회 등에서 전두환 독재의 실상을 알리는 민주화 투쟁을 벌였다.

 2년여 만에 귀국한 김 전 대통령 부부는 장기 연금과 도청, 감청에 시달리다가 1987년 전 전 대통령의 6·29 선언이 있고 난 뒤에야 마침내 활동의 자유를 얻게 됐다.

 이어진 1987년과 1992년의 쓰라린 대선 패배, 김 전 대통령의 정계 은퇴 선언과 복귀, 1997년 대선 승리 등 고비마다 이 여사의 지극한 내조가 있었다.

 이 여사는 청와대에 머무는 동안 여성과 어린이,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와 소외 계층의 권익 신장을 위해 노력했다.

 사단법인 사랑의 친구들 명예총재를 맡아 결식아동과 북한 어린이를 도왔으며, 한국여성재단을 출범하는 데도 역할을 했다. 여성부 창설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김 전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은 2000년 이 여사도 펄 벅 인터내셔널이 주는 '올해의 여성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김 전 대통령 퇴임 후 부부는 동교동 사저로 돌아왔으며, 이 여사는 2009년 8월 김 전 대통령 서거로 47년 동안 함께 했던 '동역자(同役者)'와 작별했다.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 서거 직후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으로 선임돼 동교동계의 구심점이자 재야인사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톡톡히 했다.  

  2011년 말 김정은 전 북한 국방위원장이 사망했을 때 조문단 자격으로 1박 2일간 방북, 금수산기념궁전에서 상주인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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