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이 곧 하늘”…동학, 전제군주제에 반기 들다
“백성이 곧 하늘”…동학, 전제군주제에 반기 들다
  • 이대영
  • 승인 2019.06.12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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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들불처럼 번진 농민항쟁
최재우, 난세의 구세주로 부상
이에 두려움 느낀 영남유림들
1863년 동학배척운동 일으켜
경상감영에 체포하도록 압박
결국 1863년 12월 10일 붙잡혀
온갖 고문 견디다 1864년 참형
경상감영 남문에 3일간 효수
신택리지-곽재우동상
달성공원 동편에 있는 수운 최재우 동상. 그림 이대영



 

이대영의 신대구 택리지 - (23) 민주시민의 배아 생성

1862(壬戌)년 봄철의 보리고개를 넘기지 못했던 진주주민들은 민란을 일으켰고, 농민항쟁으로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졌다.


그를 난세의 구세주처럼 믿음을 가졌던 백성들은 경주용담으로 몰려들었고 포덕을 받고자 간절한 백성들의 마음과 발길을 경상감영에서는 예의주시했다. 질환치유의 신통력은 접어두더라도 새로운 세상의 개벽을 갈망하고 있는 민심을 간파했다.

1846년 순교가 시작되었던 천주교도들도 1860년부터는 교리를 쉽게 ‘사향가(思鄕歌)’로 전파하기 시작했으며, 가장 두려움을 느꼈던 영남유림은 ‘동학이란 서학(천주교)을 머리글자만 바꾼 것(改頭幻名)’이라고 경상감영에 진압하도록 몰아붙였다. 경상감영에서는 1862년 9월29일 박대여(朴大汝) 집에서 포덕하는 최재우를 체포했다. 그러나 수백 명의 백성이 몰려와서 항의하고, 풍속을 마땅히 해한 뚜렷한 증거도 없어서 잘못하다가는 민란의 빌미만 줄 것 같아서 6일 만에 석방했다. 이런 상황처리의 소문은 날개를 달아 더욱 민심을 결집해갔다.

1863년 7월에는 영남유림을 중심으로 동학배척운동(東學排斥運動)이 생겨났고, 9월13일 상주지역유림들은 “흉칙한 무리들이 서학을 개두환명(改頭幻名)한 것으로 빛을 못 보게 넝쿨을 뽑아버려야 한다”는 우산서원(愚山書院)통문, 12월에는 도남서원(道南書院) 통문 등으로 경상감영(慶尙監營)을 압박했다. 1863년 11월 20일 경상관찰사는 정운구(鄭雲龜)를 선전관(宣傳官)으로 임명하고, 12월 10일 새벽에 포졸 130명을 동원해 최수운을 체포했다. 12월 12일 금호(錦湖)를 시작으로 매일 60~70리씩 상경했고, 12월 20일에 과천역참(果川驛站)에 도착했는데 12월 8일에 철종이 붕어(崩御)했고 12세의 고종이 등위하였기에 12월 13일에 대원군이 집권을 했다.

왕궁에 통지를 넣었더니 ‘본말과 종적을 조사해서 죄질경중을 가려 묘당(廟堂)에 품어(稟御)해 처리하라’는 비변사의 명령을 받았다. 1864년에 들어와서 경상감사 서헌순(徐憲淳)은 신문관(訊問官) 3명을 임명했고, 2월 20일 최수운을 고문했는데 다리가 부러지는 소리가 우렛소리와 같다고 전언되었다. 최해월(崔時亨, 1827~1898)이 수운선생을 만났으나 아무런 말은 하지 않으면서 담뱃대 하나를 건네고, 빨리 가라는 듯이 손짓을 했다.

담뱃대를 받아들고 바로 안전한 곳으로 피신을 한 뒤에 담뱃대를 쪼개서 안에 든 심지(心紙)를 보니 “혐의를 잡아내려 물위에 등불을 밝혔나보다 협의할 틈새가 없다. 기둥은 말라버린 모양이나 그 힘은 여전히 남아있어 보인다. 나는 천명으로 여기고 받아들이겠으니, 너희들은 높이 날아가거나 멀리 달아나라(高飛遠走).”라는 유시를 남겼다. 1864년 3월 10일(양력4월15일) 14시경 아미산(蛾眉山) 동쪽(노들벌) 관덕정(觀德亭)에 참형되었으며, 죄목은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죄목이 없자, 대명률 제사편(大明律祭祀編)의 금지사무사술조(禁止師巫邪術條)에 의거 ‘일응 좌파의 도로 정도를 어지럽힌 사술(一應左道亂政之術)’이었다. 참형 후에 머리를 장대에 달아서 경상감영 남문(오늘날 약전골목)에 3일간 효수(梟首)했다. 1864년 3월 13일에 부인 밀양박씨(密陽朴氏)와 맏아들 최세정(崔世貞)에게 인도했으며, 그들은 경주관아(慶州官衙)로 끌려가서 고문을 당했다.

동학의 청원주문(請願呪文) 혹은 강령주문(降靈呪文)은 “하늘의 지극한 기운이 지금에 왔으니 원컨대 크게 강림하여 주세요(至氣今至願爲大降)”이었으며, 예령주문(豫令呪文)은 “한울님을 모시면 조화가 정해지니(侍天主造化定)”, 본령주문(本令呪文)은 “한평생 생각을 보존해 잊지 않는다면 만사를 깨달게 되리라(永世不忘萬事知)”였다. 이렇게 청원주문 8자와 본령주문 13자로 21자 주문(三七呪文)이 되어있었다.

그러나 핵심사상은 ‘백성이 곧 하늘이다(民爲卽天)’라는 3대 교수 손병희(孫秉熙, 1861~1922)씨가 외쳤던 인내천(人乃天)이었다. 오늘날 말로는 민주시민(市民)의 배아생성이며, 인간은 누구나 하늘의 이치를 아는 존재라는 의미다. 그러나 당시 전제군주에게는 정면저항이었다. 개벽(開闢)이란 상투적인 말에 국한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우리 민족의 근대성(modernity)의 출발점은 아니라고 하는 김용옥님은 민주자치의 개념인 민본사항(民本思想) ‘플레타르키아(pletharchia)’라는 용어로 평가하고 있다.



◇국채보상운동, 경제주권을 찾아 참다운 백성이 되자!

쌀과 옥양목으로 대한제국의 숨통을 거둔다.

제(齊)나라 제상 관중(管仲. ?~BC 645)은 칼 하나 쓰지 않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며 주변국(魯)을 정벌하는 방안을 국왕 환공(桓公)에게 제안했다. 경제로 이웃나라를 정복하기는 BC 650년경에 저술된 관자(管子) 백호피(白狐皮) 실례가 있다. 우리가 가장 많이 들었던 건, 황금보다 비싸다는 비단으로 주변국가의 숨통을 걷어 들인다는 금정국론(錦征國論)이었다. 경제적 기반이 허약한 주변국가에 i) 비단을 비싼 값으로 수입하고, ii) 동시에 누에씨를 무상으로 제공해 준 뒤, iii) 앞으로 계속해서 사준다는 걸 약속해 적극적으로 양잠을 장려해서 iv) 주변약소국이 잠업(蠶業) 혹은 명주생산에 목숨을 걸도록 만든다. 이렇게 2~3년간 신용을 지켜 매입을 착실히 한다. v) 약소국의 주생산물에 있어 비단생산이 사활을 좌우할 지경인 경우에 갑자기 파탄시켜서 국가사직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한 마디로 vi)‘약소국가의 명줄을 명주에 매달아서 당겨 숨통을 거둔다(把錦絶國命)’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국왕도 백성들도 하늘 같이 여기는 경제로 국가사직을 거두는 것이 너무 잔인해서 포기하고 말았다.

이런 잔인한 경제정벌이 정한론(征韓論)의 핵심전략으로 조선반도에 실행됐다. 비단(명주)가 아닌 쌀(米)과 목면(木綿)으로 일제는 한일합병 40년 전부터 대한제국의 사실상 목줄을 만들었고 거머쥐고 있었다. 유식하게 말하면 미목절한전략(米木絶韓戰略)이었다. 1870년경 조선 무명 한 필 가격은 12문(文)이었으나 일본의 옥양목(玉洋木)은 3문이었다. 돈으로는 절대 거래하지 않았고 반드시 쌀로만 판매를 했다. 싸고 질 좋은 것이라서 쌀을 주고도 당시 국왕부터 노비들이 하나같이 옥양목으로 옷을 해 입었다. 왜냐하면 조선무명과 옥양목을 비교하면 결은 10수(手)에다가 30수로 고왔고, 폭은 1.3자(40cm)에다가 3.3(100cm)자로 광목(廣木)이었으며, 가격은 12문에 3문으로 조선무명은 조선에서도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모든 쌀이 일제상인들의 손으로 들어가자 일본으로 밀반출했으며, 조선에는 ‘밭떼기 전매’는 물론 입도선매(立稻先賣)라는 요상한 계책까지 나와 삼천리금수강산을 황폐화시켰다.

어느 정도 조선의 숨통을 거둘 목줄을 마련했다고 생각했던 1876년에 강화도조약을 채결해 공식적으로 반출했다. 1888(고종25)년에 흉년까지 겹치자 굶주린 백성을 구제할 방도가 없자, 조선천지는 연일 민란이 일어났다. 곡물수출항인 원산(元山)을 관장하는 함경도관찰사 조병식(趙秉式)은 국왕에게 방곡령(防穀令)을 제안했다. 9월에 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 제37조를 근거로 쌀은 언급도 못 하고 겨우 콩만 해외반출을 금지하는 긴급명령을 내렸다. 일제상인들의 항의로 조병식은 해직되었고, 그 자리에 한장석(韓章錫)이 부임했으나 원산항(元山港)뿐만 아니라 황해도까지 방곡령은 번졌다. 일제상인들은 조선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금 14만7천168원을 요구했다. 일제는 조선정부에 1893년 1월 원리합금 17만 5천원을 재차 협박했다. 조선정부는 곧바로 1893년 4월 방곡령해제와 손해배상금 11만 원을 지불했다.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제국주의는 느슨한 조선의 목줄을 단단히 죄고자 1889년에 서울 황국중앙총상회를 통해서 일본상인의 상권수호운동을 전개했고, 1904년에는 고문정치(顧問政治)의 미명 아래 한국경제를 파탄에 빠뜨릴 경제예속화(經濟隸屬化) 전략을 구사했다. 주요내용은 i) 조선경제융성을 위한 일본으로부터 경제차관 도입, ii) 조선통감부(朝鮮統監府)를 통한 일제차관 도입, 경찰기구 확장, 일본인 지위향상과 투자환경조성 및 거류민 시설 투자였다. 1905년 6월 국채상환 및 세계보충비(歲計補充費)로 일본 동경에서 200만 원을 공개 모금했다. 1907년에는 조선정부가 짊어진 일제의 외채총액은 1천300만 원으로 갚을 길은 전혀 없었다. 매년 세출부족액이 77만 원으로 눈덩이처럼 국채는 늘어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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