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잘것 없는 비녀 하나지만 나라에 보탬만 된다면…”
“보잘것 없는 비녀 하나지만 나라에 보탬만 된다면…”
  • 이대영
  • 승인 2019.06.19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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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김천 지좌동서 태어난 서상돈
낙동강 무대로 800리 주름잡은 대상인
1천300만원 나라 국채 상환하고자
1907년 열린 대동광문회 특별회의서
800원 의연금 낸 후 홍보부장 맡아
부산·서울·진주·평양·황해도 등
전국 기녀들도 애장품 내놓아
이후 마른 짚더미 불길처럼 확산
“담배 끊어 국채 갚자” 단연회 결성도
신택리지-시민회관국채기념탑
대구시민회관앞 국채보상기념탑. 그림 이대영

 

이대영의 신대구택리지 - (24) 경제주권회복 국채보상 범국민운동

1894년 조선 탁지부(度支部, 오늘날 재경부) 시찰관, 1898년 독립협회 재무담당 간부, 1898년 만민공동회 재무부 부장을 역임했던 서상돈(徐相敦, 1850~1913)은 경북 김천시 지좌동에서 독실한 천주교인 서철순(徐哲淳)의 장남으로 태어나 잦은 천주교탄압으로 피신하고자 이사를 자주 다녔다.

9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더 이상 전전긍긍도 한계가 오자, 외가인 대구 새방골(竹田)으로 옮겨 상점 심부름꾼 등으로 전전하면서 모아온 장사밑천으로 18살에 보부상을 시작했다. 돈이 된다는 소금, 건어물, 일용잡화를 갖고 5일 장돌뱅이로 다니다가 고령 개경포(開經浦)를 본거지로 하고, 낙동강을 무대로 부산-달성(개경포)-안동 800리를 17년간 주름잡았다. 1885년 35세 대상인으로 부상했고, 안동, 군위, 김천, 칠곡 등 토지매입으로 대지주로도 성장했다. 1894년 45세 10년간 탁지부 시찰관(度支部視察官)과 경상도 세정총괄(稅政總括)이란 관직도 맡았다.

1907년 1월 29일(혹은 2월 21일) 대구광문사 부사장으로 대동광문회(大同廣文會) 특별회의에서 1천300만 원의 조선 국채를 상환하고자 하는 취지로 즉석에서 800원의 의연금을 내놓았고, 참석자 전원의 찬성을 얻어 국채보상취지서를 작성하고 홍보부장으로 선출됐다. 처음은 대구광문사 사장 김광제, 부사장 서상돈, 박해령 등 16명으로 시작해 i) 범국민모금대회 개최 ii) 국채지원금 수합사무소 설치 iii) 서울에 김성희(金成喜), 유문상(劉文相) 등 북채보상기성회 설치 iv) 4월 8일 대한매일신보사에 국채보상지원금 총합소 설치 v) 한규설, 양기탁 등 임원 선출로 확대되었다.

부산 기녀들도 참여해 국채보상을 끝낼 때까지 매월 의연금을 내기로 결의했다. 서울기녀 39명이 현장에서 금비녀를 내놓았다. 진주(珍州)에서 1907년 3월 19일 ‘강남콩 꽃보다 더 푸른,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절개’ 주논개(朱論介)의 후예들인 부용(芙蓉)과 동료들은 애국부녀회(愛國婦女會)를 결성했다.

1907년 4월까지 의연금 참여자는 4만여 명, 5월까지 보상금이 230만 원이나 모금됐다. 특히 대구에선 1907년 2월 23일 진골목의 남일폐물폐지부인회(南一佩物廢止婦人會)가 결성되어 부녀자의 참여를 확대했으며, 반지를 벗어 국채를 보상하자는 국채보상탈환회(國債報償脫環會), 담배를 끊어서 국채를 보상하자는 단연회(斷煙會)를 결성했다. 서울에서는 2월 28일 김일당, 김석자, 박희당 중심으로 반찬값을 절약해서 국채보상의연금을 내자는 부인감찬회(婦人減餐會)모임까지 결성됐다. 바싹 마른 짚더미에 던져진 불길처럼 전국으로 번졌다.

대구에서는 18세 기녀 앵무(妓名鸚鵡, 1889~1946)가 100원을 척~ 내놓음으로써 기폭제(起爆劑)가 됐다. 이를 도화선으로 권번(券番, 일제강점기 기생조합)기생 14명이 50전에서 10원까지 쾌척하고 애국부녀회를 결성해 금비녀, 금지환(金指環) 등의 애장품(愛藏品)까지도 흔쾌히 내놓았다. 3월초에는 평양기생 31명이 “우리는 천인이지만 국민의무는 같을지니 간과할 수 있겠나?”라며 32원의 성금을 모아 평양에도 국채보상운동은 점화됐다. 4월에 황해도 안악에선 ‘반지를 빼서 국채를 보상하자’는 취지의 ‘국채보상탈환회(國債報償脫環會)’가 결성됐다. 3월14일 평남 진남포(鎭南浦) 삼화항에서는 패물폐지부녀회를 결성했다. 함경남도 단천군(端川郡)에서는 “대한 2천만 민중에 서상돈만 사람인가? 단천군 이곳 우리들도, 한국백성이 아닐런가?”하는 ‘국채보상가(國債報償歌)’노래가 울려퍼졌다.

경제주권을 회복해 일제의 경제적 침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을 눈여겨봐온 조선통감부만이 아니라 송병준(宋秉畯, 1858~1925)의 일진회도 조선통감부에 이 운동을 발본색원하도록 탄압을 요청했다. 조선통감부는 국채보상기성회 간사 양기탁(梁起鐸, 1871~1938)을 보상금횡령 누명으로 구속했다. 1908년 7월에 다시는 살아날 불씨하나 없도록 종결 처리했다. 그러나 경제적 범국민자각운동과 경제적 국권회복을 위한 국민운동은 인류역사에 하나의 위대한 발자국을 남겼다. 1999년 외환위기를 당했을 때 범국민 금모으기운동을 전개하는 불씨가 됐다.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조선정부를 탓하지 않고, 국민의 도리와 책무를 자각하면서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범시민운동으로 전개했다는 점에서 국민이 공민(公民)으로 거듭 태어났다. ‘네 탓’공방에 앞서 국가의 위험을 보고 대구시민으로서 올곧음을 실천하는 시민으로 잉태한 것이었다.

2017년 10월엔 유네스코(UNESCO)에 국채보상운동기록물이 등재됐다. 이 운동은 앞으로 경제적 주권을 위한 범시민운동의 전형으로 보존되어야 한다. 단순한 국내기록물보존에 그치지 말아야 한다. 조금만 생각하면 평양(平壤), 안악(安岳), 단천(端川) 및 진남포(鎭南浦) 등에서 추진했던 국채보상운동의 기록물까지 수합보존하고, 시민경제주권 회복차원에서 남북평화정착에서도 기여할 ‘제2의 경제시민권 회복운동’을 전개할 시대적 사명이 부여됐다.

◇2.28민주운동, 새로운 대구시민의 탄생

기원전(Before Christ) 571년부터 471년경까지 생존했다고 추정되는 중국의 노자(老子)는 저서 ‘도덕경(道德經)’에서 “큰 소리는 들리지 않으며, 큰 형상은 형태가 전혀 없다(大音希聲, 大象無形)”고 했다. 우리가 생존하는 지구를 실례로 들어보면 둘레가 4만km나 되는 큰 물체임에도 우리의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지구 4만km를 24시간 자전하고 있기에 시속 1천666km 이상이다. 달리는 자동차에 비유하면 시속 1천600km라고 하면 그 굉음이 수십만 데시벨(db)로 큰 소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전혀 듣지 못한다. 시속 300~400km는 빠르다고 하면서 지구의 자전 속도는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 태생부터 그렇게 빠른 속도와 굉음에 익숙했기에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반대로 느리고 조용한 것만을 느끼는 것이 인간이다.

달포 전에 소주를 한 잔하면서 “우리는 백세까지 살겠지?”라고 농담을 나누었던 친구가 세상을 하직했다는 비보(悲報)를 받고, 칠곡 경북대학병원 장의예식장을 찾았다.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라는 혼백이나 ‘학생지구(學生之柩)’라고 적힌 덮개헝겊을 보니 죽은 사람에게도 학생(學生)이라니, 살아있는 우리들에게 ‘삶이란 배움이다. 배움이 곧 삶이다’라는 철학을 새삼 생각했다.

오늘날 서양은 단순하게 ‘역사성과 전통성을 지닌 체계화된 지식(Systematic knowledge with history and tradition’을 학문이라고 하지만, 우리의 선인들은 학문(學問)을 i) 단순하게 박학하게 많이 아는 것(博學)에서 벗어나, ii) 매사에 탐구적 자세로 의문을 가지고(審問), iii) 폭넓은 사고와 깊이 있는 생각을 하며(深思), iv) 사리판단을 분명히 해서(明辯), v) 아는 만큼 독실하게 행동하는 것(篤行)까지를 총칭했다.

우리의 선조들은 ‘배움이 곧 삶이다(學生)’라는 즉 오늘날 평생교육(life-long education)의 생활철학을 갖고 언행일치라는 행동덕목을 실행했다. ‘위험(불의)을 보면 목숨을 내놓기(見危授命)’의 행동을 했던 선비정신이 이 땅에 명맥을 이어왔다.

이런 선비정신이 ‘불의에 저항하는 학생운동’으로 표출되었던 사례로는 1956년 5월 5일 민주당 신익희(申翼熙,1894~1956.5.5) 후보자 사망 운구행렬(運柩行列)에 참여했던 700여명의 학생들이 연행된 사건, 1957년 4월 부대통령 이기붕(李起鵬, 1896~1960.4.28)의 장자 이강석(李康石, 1932~1960)의 서울대학 무시험등록에 동맹휴학 시위, 1959년 가을 학도호국단 운영위원회장 전국대학생구국총연맹의 자유당선거운동 관여 등이 있다.

1960년 2월 28일 대구시 수성 신천변에서 장면(張勉, 1899~1966) 후보자가 유세하기로 돼있었다. 관계당국에서는 학생들의 참여를 방지하고자 대책을 강구했다. 경북고등학교에서는 2월 25일부터 해당되지도 않는 학기말시험을 마련해 2월 28일까지 추진했다. 대구고등학교는 봄 방학기간임에도 불구하고 통학을 시켜서 토끼사냥, 대구상고는 졸업생 송별회를, 경북사대 부설 고등학교는 임시보충수업 혹은 문화극장 영화관람을 강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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