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들 기억하는 게 사명
유공자 생계안정 필요해
갈등 해소 뒤 통일 논의를”
“외세에 휘둘리지 않고 남북한 겨레 모두가 하나된 마음으로 염원해야 통일이 이뤄집니다.”
6·25전쟁 발발 69주년을 하루 앞두고 만난 대한민국상이군경회 회원들은 저마다 전쟁의 상흔을 지니고 있었다. 원종수(87·대구 달서구 상인동)씨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남한에 남아있던 북한군을 토벌하던 중 왼쪽 다리가 절단되는 부상을 당했다. 전쟁 중 제대로 된 수술을 받지 못한 그는 의족을 한 채 70년 가까운 세월을 살아왔다.(관련기사 5면)
“부상 순간 아찔했지만 그래도 살아 돌아온 것에 감사했지. 목숨을 잃은 전우들과는 비교할 수 없다.”
원씨는 부상 당시를 상기하며 숨진 전우들을 떠올렸다.
김기수(88·대구 남구 대명동)씨는 인천상륙작전에서 북한군의 눈길을 돌리기 위한 유인작전에 투입됐다. 그는 전투 중 왼 종아리에 총상을 입었지만 완치가 되기도 전 재차 전투에 투입됐다. 교전 중 왼 허벅지에 다시 총상을 입은 그는 부대원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다.
“맥아더 장군이 인천으로 향하는 동안 우리 부대는 영덕으로 향했다. 비바람을 뚫고 영덕에 도착하니 북한군 3개 연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절반 가까운 부대원이 몰살당했던 기억이 아직 잊히지 않는다.”
서원조(87·대구 남구 봉덕동)씨는 후방에서 전우들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아 직접 전투에 참여하진 않았다. “다른 전우들은 몸 바쳐 나라를 지키는데 후방 지원만 하던 내 자신이 창피했다. 전우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게 내 사명이라 생각한다.”
이들은 유공자들에 대한 정부의 대우에 아쉬움을 표했다.
“금전적 보상이 목적이었다면 스스로 총을 드는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우리를 포함한 참전유공자들에게 지급되는 보상금이 적절한 것인지는 짚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어 “이번 정부가 들어서면서 뭐라고 했나, 유공자들의 생계안정지원을 강화한다고 하지 않았나. 미국의 퇴역 군인이 어떤 대우를 받는지를 보면 심경이 복잡하다. 미국과 같은 보상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의 형식적인 지원금을 보면 생색내기용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이들은 통일을 민족 최대의 과업이라 칭하면서도 통일 시점에 대해선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정상들이 몇 번 만나 이뤄질 통일이었다면 김일성이 살아있을 때 진즉 독일처럼 통일이 됐을 것이다. 외부 세력이나 대통령의 의지가 아닌 국민들의 염원과 소망이 바탕이 돼야 진정한 통일이 가능하다. 성급하게 시점을 정해 억지로 밀어부치기 보다 20년, 30년이 걸리더라도 양 측의 갈등이 모두 해소된 뒤에 자연스럽게 논의할 문제다.”
석지윤기자 aid1021@idaeg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