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에도 총량제가 필요하다
가정에도 총량제가 필요하다
  • 승인 2019.06.25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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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봉조 수필가
새벽 찬바람에, 거울 앞에서 생뚱맞은 패션쇼를 한다. 본격적으로 다가오는 여름 채비를 위해 장롱을 열어보았다. 낯선 옷들이 옷걸이에 걸려있다. 사다놓기는 했으나 입지 못해 방치되고 있는 옷, 언제 어디서 샀는지 기억에도 없는 것은 물론 포장지만 뜯은 채 접힌 자국이 선명한 것도 눈에 띈다.

새로 산 옷을 입지 못한 이유는 뭘까. 환절기에 앞서 옷을 장만했는데, 정작 입어야할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있다. 일 년을 꼬박 걸어놓았다가 다음해에 입으려고 하지만 어쩐지 어색하다. 언젠가는 입으리라, 유명 메이커의 정장을 구입해놓았으나 딱히 입을 일이 생기지 않는 경우도 있다. 살을 빼면 입을 수 있을 줄 알았던 잠자리 날개 같은 옷은 편안하고 두툼해진 뱃살이 입을 기회를 허락하지 않는다.

개성시대다. 유행을 따르지 않아도 좋다는 말이다. 갈기갈기 찢어져 허벅지가 보여도, 바지통이 치마처럼 넓거나 몸매가 다 드러나도록 쫙 들러붙는다 해도 나무랄 사람이 없다. 그러나 중도를 넘어 개성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남을 의식하지 않을 자신과 용기가 필요하다. 이래저래 입지 못한 옷들은 세월과 함께 늙어가는 사람처럼 자꾸 뒷전으로 밀려들고 있다.

한 아파트에서 살아온 지 20여 년. 그 세월동안 불어난 짐이 얼마나 많은지. 옷과 책, 주방용품과 가전제품에 이르기까지 세상이 다변화된 만큼 생활도구 또한 편의성 위주로 가짓수가 늘어나고, 계절별 또는 용도별로 소재와 디자인이 다양한 신발이나 가방도 마찬가지다. 건강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크고 작은 운동기구도 슬금슬금 거실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하나를 사고 하나를 버린다 해도 감당이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한 번 들어온 물건은 좀처럼 버릴 줄 모르니 문제다. 본래의 물품에 달려오는 사은품 또한 골칫거리다. 버리기는 아깝고, 보관하자니 장소가 마땅찮다. 충동구매도 한 몫을 한다. 색깔이나 디자인이 눈에 띄어 꼼꼼하게 따져보지 않고 산 것들이다. 날이 갈수록 공간이 줄어드는 이유다.

일전에 새로 입주한 지인의 아파트를 방문한 일이 있었다. 정리정돈이 잘 된 것이 무엇보다 보기에 좋고 부러웠다. 넓은 평수의 새 아파트로 입주를 했으니, 깨끗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 ‘정리정돈이 잘 되었다기보다 수납공간이 많아졌기 때문일 것이라’며 스스로 위로했다.

아파트를 사고팔거나 부동산 투자 등에는 재주가 없다. 하지만 나에게도 집을 옮기고 싶은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정리할 기회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질서하게 널린 옷과 책, 가방, 운동기구 등 생활용품을 일제히 뒤집어 정리하고 싶은 것이 주된 이유라면, 혹자는 답답하다며 손가락질을 할지도 모르겠다.

연장을 잘 버려야 훌륭한 목수가 된다고 했던가. 불필요한 물건을 버리는데도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눈을 감고 무작위로 절반 정도를 없앤다 해도 생활에는 지장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안고 있으려는 것은, 몸에 밴 아끼는 습성과 작은 것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미련함과 냉정하지 못한 성격 탓이라 싶다. 버리지 못한 무게만큼 마음이 무거운 것이, 운동은 하지 않고 살이 빠지기를 바라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배출량보다 투입량이 많으면 과부하로 고장이 나거나, 비만으로 동맥경화에 걸릴 수밖에 없다.

그러고 보니 수질이나 대기 등 오염물질에만 총량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가정에도 총량제가 필요하다 싶다. 배출총량제도란, 전체의 양을 미리 정해놓고 그 양에 맞추어 오염물질을 배출하도록 규제하는 방식이다. 가정에서도 물건을 일정량을 초과하지 않도록 사고 버리기를 실천한다면 그렇게 마음이 무거운 일은 없을 것 같다.

집도 고무줄처럼 사용하기에 따라 늘어나고 줄어들 수 있으면 좋겠다. 묵은 살림을 한꺼번에 정리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하루 한두 가지씩만이라도 또는 일정 기간을 정해 주기적으로 정리를 한다면, 사용가능한 공간이 탄탄한 고무줄처럼 조금씩 늘어날 수 있을 것이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가정뿐만 아니라 개인이나 사회, 직장, 단체 등 모든 조직에도 해당되는 일이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버리지 못해 무겁고 어수선한 짐을 과감하게 정리하는 운동이라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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