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 노근리평화공원’을 가다, 쌍굴의 깊은 상흔 보듬듯…풍경 밝히는 말간 연꽃
‘영동 노근리평화공원’을 가다, 쌍굴의 깊은 상흔 보듬듯…풍경 밝히는 말간 연꽃
  • 김광재
  • 승인 2019.06.27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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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수백명 목숨 앗아간 쌍굴
터널 축대 곳곳엔 수많은 총탄 자국
쌍굴다리 건너편에 세운 평화공원
기념관에 노근리 참상 유물 전시
‘꽃길만 걸어요’…5월엔 온통 꽃천지
“인권회복은 수많은 이들의 희생…”
기념관 입구 쓰인 추모 문구 ‘뭉클’
노근리평화공원
노근리사건이 벌어진 경부선 철도 밑 쌍굴.
 
노근리평화공원
노근리평화기념관 입구.
 
조각공원
숨진 어머니와 젖먹이 조각상.
 
노근리평화공원-연꽃
노근리평화공원의 연꽃.
 
노근리평화공원
위령탑.

김천을 지나면서 빗줄기는 성글어졌다. 추풍령을 넘어 황간IC로 내렸다. 영동황간로를 따라 5분 정도 달리니 쌍굴다리가 오른쪽에 보였다. 시골 도로에서 가끔 만나게 되는 그런 굴다리였다. 노근리사건 현장이라는 안내판이 없다면, 노근리사건을 다룬 뉴스나 다큐멘터리를 보지 않았다면, 어찌 짐작이라도 할 수 있었겠는가. 한번 힐끗 보고 지나칠 이 평범한 굴다리에서 갓난아이부터 노인까지 수백 명의 보통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터널 입구 양쪽의 축대에는 흰색 페인트로 표시해 놓은 수많은 총탄 자국이 그날의 참상을 짐작게 한다. 쌍굴다리 한쪽으로는 냇물이 흐르고 한쪽은 차도가 지나간다. 터널 안에 작은 조화가 몇 송이 달려있다. 오래 전에 위령 행사를 하면서 달아놓은 것 같다. 원래 흰색이었을 꽃은 콘크리트 색과 거의 같아졌다.

지난 2011년 개관한 노근리평화공원은 쌍굴다리 건너편에 조성돼 있다. 사오십 년 세월 동안 억압당했던 기억을 되살려 보존하고 있는 곳이 노근리평화기념관이다. 기념관은 지상에서 경사로를 따라 지하로 들어가도록 설계돼 있다. 지하1층 가운데에는 노근리 사건이 일어난 경과를 영상과 모형으로 보여주고, 경부선 철도와 쌍굴다리 인근에서 발굴된 유해와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또 6.25전쟁의 배경과 경과, 생존자들과 당시 미군들의 증언 영상, 미군 기관총, 당시 마을과 피난민의 모습 조형물 등이 전시돼 있다.

6.25 전쟁 발발 6일 후 미군이 참전했으나 계속 밀리다 7월 20일 대전에서도 참패했다. 미군은 영동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7월 23일 주곡리 마을로 들어와 소개령을 내렸다. 주민들은 산속마을 임계리로 피난을 떠났는데, 25일 저녁 미군들이 임계리로 들어와 남쪽으로 피난을 시켜준다고 했다. 이에 임계리, 주곡리, 타지주민 합해 500~600명이 미군을 따라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미군들은 그날밤 늦게 주민들을 하가리 하천변에 강제로 노숙을 시키고, 그들은 철수 명령에 따라 퇴각했다.

26일 아침 미군들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피난민들은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움직였다. 황간면 서송원리 부근에 도착하자 그곳을 지키던 미군들이 미군차량 운행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경부선 철로 위로 올라가도록 했다. 철로를 따라 노근리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에 그곳에 있던 미군으로부터 몸수색과 소지품 검사를 받았다. 지친 주민들은 그곳에서 점심준비를 하며 잠시 쉬었다. 정오 무렵 통신병이 어디론가 무전을 한 뒤 정찰기 한 대가 주민들 위를 선회하고 사라졌다. 잠시 후 미군 폭격기가 피난민들에게 폭격을 했고, 미군들의 기총사격도 시작됐다. 그 자리에서 많은 주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경부선 철도 아래 배수로와 노근리 쌍굴 쪽으로 달아났다. 피난민들이 쌍굴로 피신하자 미군은 쌍굴 안으로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피난민들은 쌍굴 안에 갇힐 수밖에 없었다. 그후 사흘 밤낮으로 미군들은 굴 양쪽에서 피난민의 작은 움직임에도 기총사격을 했다. 7월 29일 아침, 미군이 후퇴한 후 쌍굴에서는 400여명의 시체 속에서 겨우 10여 명이 살아나왔다. 지상1층 전시실은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을 조명하고, 다시는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인권과 평화를 위한 교훈을 얻는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노근리사건이 발생한 후 10년이 지난 1960년 가을, 노근리사건 피해자 정은용씨는 피해자 몇몇의 서명을 받아 미국 정부에게 공식 사과와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소청서를 제출했으나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미국의 잘못을 말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됐다.

정은용씨는 1994년 4월15일 10여년의 준비와 집필 끝에 노근리사건을 내용으로 하는 실화소설을 출간했다. 1999년 9월 30일 AP통신에 의해 노근리사건의 실상이 전 세계에 전파되자, 전 세계의 주요 언론들은 노근리사건을 주요 뉴스로 다루기 시작했다.

한미양국 대통령 지시에 의해 노근리사건 진상조사가 시작됐으나 미국 측은 핵심정보를 재대로 제공하지 않았다. 한미양국 정부는 합동조사가 아닌 각각의 진상조사를 1년 3개월 동안 진행한 끝에 2001년 1월 각각의 진상조사 보고서와 양국의 공동이해 형식으로 7쪽의 한미공동 발표문을 발표했다. 미국 클린턴 대통령은 노근리사건에 대해 유감을 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2004년 국회에서 노근리사건의 희생자 및 유족들의 심사와 명예회복을 위한 노근리사건 특별법이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노근리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회복 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226명을 희생자로 인정했다. 미군의 발포 명령이 있었다는 것은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았으나, 지하1층 전시실의 증언 영상에서 당시 미 7기병연대 본부 문서병이었던 맥 힐리어드씨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게이사단장으로부터 내려온 명령문서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명령은 미8군 사령부의 명령에 근거하여 사단장이 내린 명령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가 민간인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것을 알고 있습니다.”

기념관 밖에는 조각공원과 위령탑, 그리고 넓은 생태공원이 조성돼 있다. 지난 5월에는 이곳 노근리 평화공원에서 ‘노근리, 꽃길만 걸어요’라는 주제로 정원축제가 열렸다. 축제 때에는 온통 꽃천지가 되었을 것이다. 지금은 빗속에서 연꽃만이 눈에 띈다. 기념관 입구에는 이렇게 씌어있다. “인권회복은 수많은 이들의 땀과 희생으로 이뤄지며 평화는 누리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김광재기자 contek@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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