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산으로 가지만 우리는 글씨를 쓰네
누군가는 산으로 가지만 우리는 글씨를 쓰네
  • 김영태
  • 승인 2019.07.08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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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헌 김만호의 예술세계를 찾아서 (21)-장년시절12. 1972년(65세)
중년서 노년으로 가는 길에도
한의, 서도, 詩作 멈추지 않고
뜻있는 이들과 봉강서계 활동
봉강서계취회광경
봉강서계 취회 광경(1972.4.6.가산 다부동)

소헌 선생이 대구로 이주(1953)한지 어언 20년이 흘렀다. 선생은 대구에서 중년(中年)을 살아왔고 지금은 60대 중반을 넘기며 장년(長年)을 지나 노년(老年)을 향하고 있었다. 대구의 대봉언덕(鳳岡)에 터를 잡아 집(齋)을 짓고(1961) 서실(鳳岡書室)을 내어 그동안 한의(韓醫)와 오로지 서도(書道)의 외길을 살아 왔다.
1972년 임자년에 선생은 당호(堂號)인 봉강재(鳳岡齋)의 설표(設標)를 비망록에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봉강재 4표설(鳳岡齋四標設)
속칭(俗稱) 남구(南區) 방천시장(防川市長) 입구(入口) 수성교(壽城橋) 미급지대(未及地帶), 비슬산(琵瑟山) 동맥(東?) 대덕봉(大德峰) 위주령(爲主嶺) 용두입수(龍頭入首).
동유(東有) 수성지(壽城池) 이위(而爲) 대동(大洞) 상중하(上中下) 수성동(壽城洞), 서유(西有)봉산동(鳳山洞) 루(樓) 봉산사(鳳山寺) 수도산(修道山) 명천(名泉), 남유(南有) 봉덕동(鳳德洞) 효성봉(曉星峰), 북유(北有) 삼덕동(三洞德) 지인용(智仁勇) 삼달덕연(三達德連) 유(有) 동인동(東仁洞).
주(註) 원근산천(遠近山川) 상부상즙(相俯相楫). 우(右) 이십리(二十里) 허(許) 경산(慶山) 자인(慈仁) 각지(各地), 후(後) 이십리(二十里) 허(許) 가창계곡(佳昌溪谷).
연린성시(連隣城市) 잠우지지(暫寓之地) 비영구지기(非永久之基). 고(故) 제일(第一) 선택(選擇) 칠곡(漆谷) 가산(架山) 다부동(多富洞), 제이(第二) 선택지(選擇地) 경산(慶山) 고산면(孤山面), 제삼(第三) 동남간(東南間) 이십리(二十里) 허(許) 만촌동(晩村洞) 형제봉(兄弟峰) 입수전(入手前) 유(有) 노적삼봉(露積三峰) 즙이후(楫而後) 유(有) 문필봉(文筆峯).」이라 적혀 있다.

◇봉강팔경운(鳳岡八景韻)
그리고 임자년(1972) 9월에는 아래와 같이 봉강서당(鳳岡書堂) 팔경(八景)의 시(詩)를 지어 병서(屛書)로 써 두었다.
「鳳岡八景 봉강팔경
1. 新川細雨 신천세우 <春景>
細雨??二月春 新川物色漸加新 세우비비이셌신천물색점가신
從今大地氷初解 草木群生被澤均 종금대지빙초해 초목군생피택균
2. 達城旭日 달성욱일 <夏景>
南州勝地達城園 逐口遊人雲若屯 남산승지달성원 축구유인운약둔
也識仙區於民在 奇花瑤草盡雜言 야식선구어민재 기화요초진잡언
3. 花園春風 화원춘풍 <春景>
羅王古蹟賞花臺 臺下長江滾滾來 나왕고적상화대 대하장강곤곤래
??春風吹不盡 千?爛漫滿園開 애애춘풍취불진 천파난만만원개
4. 壽城遊船 수성유선 <夏景>
勝日尋芳壽澤邊 遊船輕壓水中天 승일심방수택변 유선경압수중천
金鱗潑潑飜吹浪 ?草菲菲綠漲烟 금인발발번취랑 니초비비녹창연
5. 逸菴泉石 일암천석 <夏景>
逸菴泉水夏猶凉 千古雲林護石岡 일암천수하유량 천고운림호석강
避暑登臨多小客 塵襟滌盡興偏長 피서등임다소객 진금척진흥편장
6. 瑟峀丹楓 슬수단풍 <秋景>
秋日琵山景色佳 ?霜楓葉騰春花 추일비산경색가 감상풍엽승춘화
千林錦繡任還鳥 萬點?脂凝宿? 천림금수임환조 만점연지응숙가
7. ?湖落? 금호낙안 <秋景>
風高露冷錦江秋 水接晴天一色流 풍고로냉금강추 수접청천일색류
十里蘆花飄白雪 飛鴻數點落長洲 십리로화표백설 비홍수점낙장주
8. 公山雪月 공산설월 <冬景>
千尋玉立八空山 試問仙靈在那間 천심옥립팔공산 시문선령재나간
雲散雪晴明月夜 寒松瘦鶴世情閑 운산설청명월야 한송수학세정한
鳳岡八景韻 壬子重九節 素軒吟自抄 봉강팔경운 임자중구절 소헌음자초」
(해석 생략)

 

소헌선생-봉강서계
소헌 선생의 자필서 ‘봉강서계 취회 2주년 감상문’(1972.4.6)

◇봉강서계(鳳岡書?) 2주년 취회(聚會), 1972.4.6(음 3.3)
봉강서계가 발족(1970)되고 난 후 지난해(1971)에 첫 취회(聚會)를 하였고, 이어서 두 번째 취회가 임자년(1972) 늦은 봄에 가산에서 열렸다(유사:도리석,김석환,남두기). 선생은 그 때의 감상을 다음과 같이 필서(筆書)해 놓았다.
「觀 鳳岡書?二週年聚會 ?其光景.
世在壬子 時惟暮春 鳳岡?聚 於焉再回 架山峻嶺 多富洞天 山明秀麗 柳錄花紅 ?翔日高 蝶?風輕 男女?員 數十餘人 或有登山 頭揷鵑花 或有臨溪 手弄川魚 臨池揮毫 晉唐遺法 誦詩讀書 鄒魯餘風 各其所長 盡日逍遙 快然自得 不覺西日 携手聯襟 散步歸程 其趣可知
壬子三月三日 鳳岡主人 素軒」
해석하면
「봉강서계 2주년에 취회하는 것을 보고 그 광경을 쓰다.
임자년 늦은 봄에 봉강서계 모임이 어언 두 번째이다. 가산 고개 다부동 밝은 하늘의 산수는 빼어나게 아름답고 버들은 푸르러고 꽃은 붉게 피었다. 제비가 하늘 높이 날고 나비들이 떼지어 바람결에 나부끼는구나. 남녀 계원(?員) 수십명이 어떤 사람은 등산하면서 머리에 두견화를 꼽고 어떤 사람은 개울가에서 손으로 물고기와 함께 놀기도 하더라. 먹을 갈아(臨脂) 휘호를 하니 진(晉), 당(唐)이 남긴 서법(書法)이요 시(詩)를 외고 글을 읽으니 공자(魯)와 맹자(鄒)가 남긴 풍습이라. 각각 잘하는 것으로 하루를 보내면서 쾌연(快然)히 스스로 흡족하여 해가 지는 줄 몰랐다. 서로 손잡고 어울려 슬슬 걸어 돌아오니 그 경관(景觀)을 가히 알만 하구나.
임자 1972년 3월 3일에 봉강주인 소헌」

70년대 초반의 이 시기는 급속한 경제 성장과 함께 동서 냉전체제가 붕괴되는 국제 정세의 영향으로 남북통일에 대한 국민적 염원이 일고 있었던 시기였다. 이즈음 대한적십자사가 '남북한가족찾기회담'을 북한에 제의하여, 분단(分斷) 26년만에 판문점에서 남북적십자 대표의 첫 만남이 이루어 졌다(1971.8.20). 그러나 남북 이산가족찾기 회담은 북한의 대립으로 결열되고 실향민들의 혼돈만 가중되었다.
이듬해인 1972년에 남?북한은 남북 자주평화통일 3원칙을 합의하고 서울과 평양에서 성명(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분단 이후 최대의 남북 통일관계 선언이었다. 남북적십자회담을 재개하고 제반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남북조절위가 구성되었다. 먼저 '남북한 스포츠교류를 위한 회의'를 판문점에서 몇차례 개최했으나 남북교류는 이행되지 못하고 시국은 반정부운동으로 확산되어 정국의 혼란상태가 지속되었다.
결국 1972년 10월 1일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10월 유신)되고 개헌국민투표(1972.11.21)를 실시하여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된 박정희대통령은 1973년 평화통일 외교정책(6?23선언)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은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과 상호 내정불간섭 등이었다.

김영태 영남대 명예교수(공학박사,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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