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에 비를 내리게 한다는 것
스크린에 비를 내리게 한다는 것
  • 백정우
  • 승인 2019.07.11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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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우의 줌인아웃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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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장면을 찍는다는 것은, 빗줄기 양과 굵기를 어느 정도로 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이다. 비 내리는 시간의 지속 정도와 그 속에 인물을 어떻게 배치하는가를 정하는 일이기도하다. 처음부터 빗줄기를 보여줘야 할 때가 있는 반면 감추었다가 인물이 스크린 가까이 도달해서야 비를 보여주는 것이 효과적일 때도 있다. 비 오는 장면을 잘 찍기로 일본영화만한 것이 없다. 과거 일본에는 영화사마다 특기부가 있어서 감독의 의도에 따라 작품과 상황에 어울리는 비를 내리게 했다. 유독 일본영화에 비 내리는 장면이 많은 건 우연이 아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릴 때마다 나타나는 녀석이 있다. 이름은 아키라. 육상부였고 고등학교 기록보유자이다. 아킬레스건 파열로 운동을 그만둔 후 패밀리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열일곱 살 소녀다. 레스토랑 점장은 마흔다섯 살 이혼남이다. 소설가를 꿈꾸던 문학청년에서 일상에 찌든 아저씨로 전락했다(고 본인은 생각한다). 한 쪽은 몸을 다쳤고 다른 한 쪽은 마음이 닫혔다. 상처 입은 두 사람이 세상을 향해 쏘아올린 재기 신호탄을 멜로드라마 관습으로 소화한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의 출발이다.


영화는 제목에 걸맞게 비 오는 장면이 많다. 점장과 아키라가 처음 대면할 때도, 아키라가 속마음을 고백하던 날도, 고열로 앓아 누운 점장 집을 찾은 밤에도 비는 어김없이 내렸다. 힘든 시절에 대한 메타포로 비를 선택한 감독은 결정적 순간마다 효과적으로 비를 쏟아 붓는다. 책을 좋아하는 점장 캐릭터에 맞춰 아쿠타카와 류노스케 『라쇼몽』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소설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손을 거쳐 걸작 영화 ‘라쇼몽’이 되고, 구로사와는 비 내리는 장면을 어떻게 찍어야하는지를 보여준다.).

비 내리는 장면 묘사에서 가장 중요한 건 조명이다. 실제로 비가 올 때 현실을 배경으로 잡아도 빗방울은 보이지 않는다. 비를 비답게, 즉 비가 비처럼 보이게 찍기 위해서는 비의 반대편에서 조명을 쏘아 빗방울이 부각되도록 하는 절차가 필요하다. 예컨대 아키라가 점장 집을 방문한 시퀀스. 직사각형 구조인 점장 집은 큰 창문이 2면을 차지한다. 창밖엔 비가 억수로 내리붓고 아키라와 점장은 각각 창문을 등지고 앉아있다. 이런 경우 대게는 창문 하나만 배경으로 비를 찍는다. 먼 쪽 창문까지 포함시키면 스태프와 살수차와 조명까지 모든 게 2배로 소요되기 때문. 그런데 감독은 두 창문 모두에서 비를 뿌린다. 아키라의 따뜻한 마음과 비가 만나 낭만의 정조를 피워 올린 명장면이다.

아픈 다리를 끌고 패밀리레스토랑에 들어온 아키라에게 따뜻한 커피 한잔을 내주며 “비는 곧 그칠 겁니다”라고 위로했고, 아르바이트생인 된 아키라가 끝내 육상을 포기할 기미를 보이자 “비가 그치기만 기다리는 건 너무 따분하잖.”하고 독려한 것도 점장이었다. 중요한 상황마다 비를 등장시켜 인물의 심리를 보여주던 영화는 그렇게 만난 두 사람이 회복의 시간을 거쳐 승진을 앞둔 점장과 운동을 다시 시작한 아키라가 조우하는 장면으로 끝맺는다. 영화에서 비를 내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비의 서정성은 어떤 방식으로 서사를 인물의 정서와 밀접하게 관계 맺게 하는지 증명한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 아름다운 관념의 형상물이 되어 화자의 의식으로 내리는 비다운 비, 비가 매개물로 작동하는 한국영화를 보고 싶다.

백정우·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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