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 실체 찾아 美 유학행
소음공해 녹인 설치작품 ‘소리’
스피커 활용 ‘청각의 시각화’
동양사상 담은 ‘해골’ 전시도
1980년대 중반, 작가 권정호는 혼란에 빠졌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현대미술이 서양의 흉내내기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에 대한 강한 의문이 들었다. ‘남의 것이 아닌 바로 나의 미술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잠 못 드는 밤이 쌓여갔다. 정체성의 문제였다. 당시 작가는 오래 고민하는 쪽보다 ‘정면돌파’를 택했다. 현대미술의 본고장인 미국 뉴욕에 가서 현대미술의 실체를 제대로 보고, 느끼고, 경험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고, 주저 없이 뉴욕행을 감행했다. 미국 유학길에 오른 것.
“궁극적으로 서양미술 흉내내기가 아닌 한국적인 작품을 하기 위해 서양현대미술의 본고장에 가서 제대로 공부하려는 생각이었어요.”
80년대는 산업화가 정점을 달리던 시기였다. 산업화의 주도국이었던 미국 땅에 발을 디딘 유학생 권정호도 이 시기 문명의 이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하지만 화려한 문명에 취할 틈도 없이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도로 위의 자동차나 거리에서 들려오는 각종 소음들이 피부에 난 종기처럼 신경을 거스른 것. 설상가상 비만 오면 천장에서 들려오던 빗물 떨어지는 소리는 강렬한 스트레스원이 됐다.
‘소음’으로 인한 긴장 때문이었을까? 우연히 길가에 버려진 스피커를 보고 홀린 듯 집으로 가져와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1984년 어느 날의 일이었고, 당시 그의 손끝에서 ‘소리’ 연작 3개 작품이 탄생했다. “버려진 스피커에서 소음 공해에 시달리고 있던 저의 처지가 겹쳐졌어요.”
최근 시작한 봉산문화회관 전시에 1985년에 제작된 ‘소리’ 연작 3개가 걸렸다. 그가 뉴욕에서 처음 수집했던 스피커로 만든 작업들이다. 전시장 가장 높은 벽면에 85년 작 ‘소리 85’를 재현한 작품이다. 스피커의 울림통을 착안해 세로로 긴 박스를 만들고 박스 내·외부에 스피커와 악보, 자 등의 오브제를 설치하고 앞면 일부에 악기를 연주하는 손을 그리고 옆면에는 SOUND라는 텍스를 새겨 넣었다. 찰나적으로 흩어지는 소리의 실체를 ‘소리’와 관련된 개념적인 소재나 소리를 내는 직접적인 오브제인 스피커를 활용해 청각적인 소리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했다.
“우리 주변에 있는 현실음을 작품으로 가져와 시각적으로 표현했죠.”
1984년에 시작해 1985년에 완성한 회화작품 2개도 걸렸다. 화면에 스피커와 깨진 유리조각을 평면에 붙이고 표면을 거친 붓질로 선을 긋고 점을 찍은 작품이다. 작가는 이 두 작품에서 소리의 현대적인 상징물인 스피커와 한국의 전통 문풍지를 통해 들어오는 바람소리를 추상으로 표현하며 비가시적인 소리를 가시화했다. ‘한국적인 현대미술’이라는 그의 방향성에 실마리를 제공한 작품이었다.
“전통 창호와 바람소리라는 전통소재를 현대미술의 소재로 끌고 오고, 동서양 기법의 혼용으로 한국적 현대미술의 출발을 알렸어요.”
권정호 하면 해골이다. 작가는 오랜 시간 ‘해골’ 연작에 몰두해왔다. ‘해골’을 평면 회화와 입체 혹은 설치미술 형식 등 다양하게 풀어내고 있다. 이번 전시에 ‘해골’ 연작의 시초격인 세 작품이 소개되고 있다. 1985년 작 ‘해골 85’와 악다문 이를 드러내어 현실의 모순과 억압에 대한 저항을 상징하는 1987년 작 ‘해골 87-1’, 그리고 석고로 본떠서 만든 해골을 마치 하얀 바닥 속에서 발굴해낸 듯이 설치해 전시실 바닥 전체를 세계의 상상 덩어리처럼 작품화한 최근작 ‘해골’ 등이다.
소리에 이은 해골 연작은 한국적인 현대미술에 한 걸음 더 다가간 작품으로 평가된다. 음양론, 이기이원론, 삶과 죽음이라는 동양사상을 담는 그릇으로 ‘해골’을 차용했기 때문. 작가가 “해골은 삶과 죽음, 그리고 시간을 나타내는 소통의 대상이자, 인간이 기피하는 충격적 대상”이라고 운을 떼고 “나는 그런 충격을 통해 절대적인 파국을 초시간적인 방법으로 구현하고‘자 노력한다”며 해골에 담아내려는 의미를 언급했다. “저는 해골이 파국으로서의 대상이 아닌 명상의 매개로 활용하죠. 해골이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한국적인 리얼리티를 연상시키는 동시에 우리의 삶을 치유하는 기제인 것이죠.”
권정호가 자신의 예술을 ’그릇‘에 비유했다. 현대의 사물들을 통해 그릇으로 차용해 현대문명과 사유 등의 사회적인 산물들을 담아낸다. 스피커가 현대 문명이 낳은 현상들을, 해골을 동양의 사유를 풀어놓는 그릇으로 활용하는 것. 한국적인 현대미술을 추구했던 권정호에게 전환기가 되는 1985년 작품을 소개하는 봉산문화회관 4전시실 ’권정호-뉴욕1985‘전은 9월 29일까지. 053-661-3500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