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부터 70대까지 지도…향토 서예가 30여명 배출
10대부터 70대까지 지도…향토 서예가 30여명 배출
  • 김영태
  • 승인 2019.07.22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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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학 양성 온 힘
서실 제공부터 교육까지 무료
문하생 국전·신인전 등서 입선
서도회 꾸준히 전시 갖고 번창
글쓰지 않을 땐 제자들과 토의
◇ 꾸준한 개인 활동
국전 출품 10년 기념 재출품
경북미술전람회 1회 심사위원
1974년 첫 경북도전 초대작가
재6회봉강서도회전개막식
재6회 봉강서도회전 개막식. 왼쪽부터 김춘수(대구예총회장), 박선정(봉강서도회장), 소헌선생, 서찬호, 김제완씨 (1974.5.22)

 

소헌 김만호의 예술세계를 찾아서 (22)-장년시절13.1973(66세)~1974(67세)

소헌 선생은 생의 마지막을 예감하면서도 늘 그랬던 것처럼 창작에 대한 끈은 일관되게 유지해 갔다. 1973년 해가 바뀌면서 고혈압 증세가 얼마나 회복되었는가 스스로 시험도 해 볼겸 그리고 국전(國展)에 출품한지 10년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육조체(六曹體)로 쓴 작품을 문하생들과 함께 국전에 출품했다. 작품명은 「절록정문공비(節錄鄭文公碑)」이다. 선생은 이번 작품이 국전 마지막 작품이 될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고 제자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선생의 비망록에는 7언 절구 「泰山雄高高有山 滄海雄深深又底」가 메모되어 있다. 태산이 아무리 높고 높아도 더 높은 산이 있고, 푸른 바다가 아무리 깊다고 하지만 또한 더 깊은 곳이 있다. 그때까지 국전에 출품할 때마다 늘 되뇌이던 이 자작시(自作詩)는 “서도의 경지는 한(限)이 없으며 평생을 계속해도 그 끝에 닿을 수 없고 늘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쓰기만 할 뿐이지 어쩔 수 없구나”. 선생은 자작시 한 수에 안타까운 심정을 싣고 더 큰 인고(忍苦)로 서도의 근원(根源)에 접근해 갔다. 그리고 “언젠가는 제자가 나보다 더 높고 크고 또 더 깊고 더 넓은 서도의 세계를 펼칠 날이 오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도락삼매(道樂三昧)

제6회 봉강서도회 전시회 준비가 한창이던 초여름 매일신문 문화부 이태일(李泰一)부장은 기획특집을 마련하여 그 첫 회에 소헌 선생에 관한 기사를 취재하여 크게 보도했다.

다음은 「도락삼매(道樂三昧). 서도(書道)-김만호(金萬浩)옹」 (1973.5.13)의 전문(全文)이다. 원문(原文)을 그대로 인용하여 기록한다.

「누구나 한가지의 취미(趣味)나 도락(道樂)은 있게 마련, 경제성장률이 높은 국민일수록 그 농도는 진하다고 한다. ‘무취미가 취미’란 인사(人士)가 있는가 하면 평생을 한가지 취미에 거의 광적으로 파고 드는 집념의 인사도 있다. 한길 만을 외곬로 파고드는 인생.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들은 외길에서 느끼고 터득한 바가 있을 것이다. 이에 그들의 취미와 도락의 길을 엿본다.

“서도는 나의 취미 나의 도락이라기 보다 나의 종교, 나의 생활”이라고 말하는 소헌 김만호(66)옹. 문방사우(文房四友) 특히 한자루 붓, 그의 60평생은 평생 반려자로 붓자루와 같이 나란히 걸어왔다. ‘취미’니 ‘도락’이라기보다 차라리 ‘선(禪)’과 ‘도(道)’의 수양으로 예도(藝道)의 길을 밟아 왔다는게 적절한 표현이겠다.

그의 손에선 붓이 떠나지 않는다. 붓을 잡거나 서책을 보는 시간 외에는 제자들과 서론(書論)을 토의하는게 요즘의 일과(日課). 옛사람은 “노후창하(老後窓下)에 고첩(古帖)을 대하면 스스로 성세(聖世)에 태어난 행복감을 느낀다” 했다. 동양의 독특한 정신예술(精神藝術)인 서예는 정신의 발로요 인격의 표현이며 심정을 그리는 심화(心畵)라 했다. 긴 세월에 걸쳐 끊임없는 노력과 고상한 인격을 바탕으로 해서 ‘일가(一家)의 서(書)’가 이루어 지는 것. 자형(字形)을 바르게 하고 필력(筆力)을 내는데서부터 수양에서 얻어지는 아취(雅趣)와 품격(品格)에 이르기까지 그 근간(根幹)은 ‘심정필정(心正筆正)’이라 했다.

정신수양(精神修養), 다문다견(多聞多見), 수완연마(手腕硏磨)의 조건 중 정신수양을 첫째로 꼽는 소헌은 제자들에게 이를 가장 강조하고 있다. 10대(代)에서 70대(代)까지 기백명의 제자들에게 베푸는 그의 인간적인 사랑은 서도에의 집념과도 병행되는 것. 서예가 ‘도(道)’의 과정이라면 그는 ‘서도(書道)로 향하는 집념의 결정체(結晶體)‘임이 틀림없다.

1점 1획 1자 1행에 보다 높은 차원의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구도자(求道者)의 자세, 법고창신(法故創新)의 새로운 경지를 스스로 찾고 깨달을 때 그는 이런 서도에서 인생의 보람과 삶의 삼매경(三昧境)을 깊이 체득한다고 했다.

끈기있고 철저하고 섬세한 그의 성격은 서도(書道)에서 구도(求道)로 고혈압이라는 사경까지도 극복, 바야흐로 서도의 화려한 꽃을 피우고 있다. “서도는 인격 수양에 도움이 됨은 물론 정신 건강에도 많은 도움을 주어 수명(壽命)까지도 연장할 수 있다”는게 소헌 선생의 지론(持論).

흔히 “해서(楷書)는 소헌하고는 얘기도 하지 말라”고 한다. 해서(楷書)에 달통했다는 얘기이겠다. 해서로 국전에 첫 입선, 첫 특선을 했다. 11회에서 17회 까지 잇달아 일곱 번을..., 유공·권체, 안진경체, 구양순체, 조맹부체의 해서로 입선을 했고 각법체(各法體)를 선법(選法) 가미한 소헌의 독자적인 체로 특선을 했다. 7세때 가친(家親)에게 붓 잡는 법을 배운 뒤 12세때 서울에서 당시 명서예가(名書藝家)인 김희덕(金熙德)씨를 독선생으로 모셔다 본격적인 서법(書法)을 배웠다. 13세엔 ‘붓글씨 잘쓰는 신동(神童)’이란 소문이 상주(尙州) 고을에 자자했다. 국전에 7회나 잇다라 입선한게 결코 우연지사(偶然之事)가 아님을 알 수가 있다.

“…서예수련에 있어서의 그의 강열한 구도정신은 진(晉)의 왕희지, 당(唐)의 유공권, 구양순, 안진경 등의 도리(道理)를 터득하고 나아가 현재의 독자적이고 원숙한 경지를 개척한 서예가…” 경북문화상 수상 당시 추천사의 한 구절이다.

소헌의 문하(門下)에선 향토의 중견 서예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국전(國展)에 10여명, 민전(民展)인 동아국제미전에 10여명, 신인전과 국민전에 10여명을 입선시켰다. 그는 61년에 봉강서도회를 창립, 오늘까지 서실 2칸을 무료로 제공하고 무보수로 지도하고 있으며 오늘도 제자들의 작품 지도에 여념이 없다. 또한 “서예작품을 상품화(商品化)하지 말아야 한다. 서예는 하나의 도(道)요, 학문(學問)이지 결코 일종의 상도구(商道具)로 취급돼서는 안되는 것이다”라는 것이 그의 신념이기도 했다. (泰)」라고 기고하였다.

소헌선생의작품
신해(辛亥) 국추(菊秋)에 휘호한 소헌선생의 작품 「서법삼매가(書法三昧歌)」. 1971

제6회 봉강서도회(회장 박선정) 서예전은 5월 22일부터 27일까지 대구백화점 화랑에서 열렸다. 54명의 작품 77점과 소헌 선생의 찬조작품 「출사표(出師表) 10곡병」, 「행서 2곡병」을 출품하였다. 이듬해 74년에는 제7회 회원전(회장 김세헌)을 대구백화점 화랑(1974.4.24~4.29)에서 가지고 문하생 42명의 작품 80점을 전시 발표했다. 선생은 10곡병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찬조출품했다.

이즈음 선생은 나름대로 회원들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안간 힘을 썼다. 투병 중에도 서도는 생활의 일부가 되기는 했지만 왼쪽 손이 마음 먹은 대로 잘 움직여 주지 않았다. 하지만 선생은 서도에 대한 열정의 끈을 놓지 않았다. 서도의 생활화를 향해 꾸준히 나아갔고, 그런 선생의 노력으로 서도회는 날로 알차게 번창해 나갔다.

이 무렵 언론들은 여러 각도로 조명해서 ‘소헌선생’과 ‘봉강서도회’를 앞다투어 취재하여 보도했다. 74년 2월 9일 매일신문은 기획시리즈 「소재의 벽에 부닥칠 때」 제하(題下)로 소헌 선생을 취재하여 게재했고, 이어 2월 25일에는 경북대신문(慶北大新聞) 「우리의 얼」 특집 시리즈 첫회에 ‘서도(書道)’를 다뤘는데 소헌 선생의 어록과 작품활동을 한면 전체를 할애하여 실었다.

1974년은 제1회 경상북도미술전람회(慶北道展)가 개최된 해이다. 소헌 선생은 1회 때부터 6년간 심사위원을 맡아 출품작들을 심사했고 74년 첫해에 경북도전 초대작가 작품으로 ‘영남루시(嶺南樓詩)’가 초대전시되었다.

김영태 영남대 명예교수(공학박사,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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