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 알의 밀알이 될 수 있을까?
나는 한 알의 밀알이 될 수 있을까?
  • 승인 2019.07.28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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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연수
소아과 원장
대구시의사회 재무이사
사실 소아청소년과 의사라는 직업은 어떻게 보면 축복받은 직업일 수도 있다. 물론, 그렇게 심하게 울어대는 아이들을 어떻게 보나요? 하고 묻는 이들도 있고 어른들만 보는 타과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질색 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늘 어리고 예쁜 아기들을 평생 볼 수 있지 않은가. “끌끌끌” 달래는 혓소리에 뭔가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에 눈물방울을 또르륵 단 채로 나를 보다가 금방 방긋 웃어주면 이 세상 어떤 청량음료보다도 더 속을 뻥하고 뚫어주기도 하고 진찰 때마다 소리소리 질러대면서 울던 놈들이 나를 몇 번 봤다고 웃어 줄 때는 세상 행복하니까. 그리고 한 곳에서 오래 진료를 하다 보니까 코 찔찔 흘리던 아이들이 훌쩍 커버려 나보다 키도 크고 늘씬한 청소년이 되어 나타날 때는 내가 키운 건 아니지만 뿌듯하고 군대 간다고 인사를 오기도 하면 참 기분이 좋다.

하지만 이런 소아과 의사도 얼마나 더 오래 할 수 있을까 싶다. 일단 출산율의 급격한 감소로 인해 소아 인구가 자꾸 주는 것이 문제이다. 부부 한 쌍이 아이를 낳는 숫자는 2.23명으로 늘어나는 추세이지만 성인 여성(만19-49세)의 아이 출산율은 0.97명으로 자꾸 줄어들고 있다. 결국은 비혼족이 늘어나면서 전체적인 출산율 감소가 가속화되고 있다. 시사저널에서 20대를 상대로 실시한 저출산 관련 ‘말말말’을 보면 좀 더 구체적 이유가 드러난다. “ 안 낳아서 망하는 게 아니라 망할 세상이니까 안 낳아, 힘든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것도 부모로서 죄 짓는 것, 여유가 없어 출산은커녕 연애 생각도 못해... ”

어찌보면 내가 우선이고 결혼과 출산을 부담스러워하는 마음가짐이 커진 탓이리라. 옛날에도 살기 어려웠고 지금도 헬조선이니 살기 힘든 건 마찬가지인데 차이점은 그 어려움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이겨내려는 마음가짐이 없어진 것이 아닐까.

아이들 진료 때 보면 손톱 발톱을 물어뜯어서 깎아본 적이 없다는 아이들이 많은데 그 이유가 뭘까? 정확한 이유를 알기는 힘들지만 어릴 때부터 부모의 적극적인 보호를 받다가 학교를 들어가고 나 혼자 극복해야하는 일이 많아지다 보니 혼자만의 시간을 어쩔 줄 몰라 하는 건 아닐까. 의과대학 교수로 있는 친구 얘기를 들어봐도 성적이 잘 안 나오면 왜 우리 애한테 이런 점수를 줬는지 따지는 부모가 많고 대학에서도 과외를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처럼 아이를 잘 키운다는 개념이, 물고기를 잘 잡을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게 아니라 물고기를 잡아주거나 물고기가 많이 잡힐 만한 데로 데려가거나 심지어 잡아서 입에 넣어주어야 안심하는 방향으로 가 버린 건 아닌가. 다른 이를 배려하는 마음보다는 이 어려운 세상에 내가 먼저 살고보자는 생각을 먼저 심어준 것은 아닐까.

이러다보니 힘들고 어려운건 하지 않으려 하게 되고 전문의 과 선택 때도 밤잠을 설쳐야하고 힘든 과는 기피하는 현상이 유독 두드러져 앞으로는 응급을 다투는 수술이나 시술을 받을 곳이 없어져 버릴 수도 있다. 내가 안하더라도 힘든 일을 하려는 타인을 존중해주는 최소한의 마음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분초를 다투는 응급 산모 수술에 평생을 바쳐온 산부인과 의사도 판단 잘못으로 몰아 법정구속을 시켜버렸다. 응급 상황에서 신생아를 케어하던 전공의의 실수도 법적인 잣대로 벌을 주는 세상이니 당연하다해야 하는가. 아이를 보는 일이 무서워졌다. 의과대학 실습학생들이나 초보 전공의가 특히 산부인과에서 산도가 어느 정도 열렸는지 알기 위해 내진을 하거나 옆에서 지켜보아야 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 산모들이 특히 이 문제에 민감해서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는 등 실습 자체를 거부하는 경우도 많은데 캐나다에서는 우리 아이들이 다음에 진찰을 받아야 할 예비 의사 선생님이니 많은 실습이 필요하다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좋은 의사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훈련과 실습을 차근차근 거쳐야 비로소 훌륭한 의사가 될 수 있음을 아는가. 얼마 전 안민석의원이 정신과 병원 개설에 관여하면서 많이 시끄러웠다. “일개 의사가 감히... 삼대에 걸쳐...” 일개의 미천한 의사에게 나중에 자기의 목숨을 치료받을 수 있겠는가. 자존심 상해서. 그리고 막말 자체도 문제이지만 우리 동네에는 정신과병원이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주민들을 설득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선도해야하는 국회의원이 이게 할 짓인가. 나도 언제든 정신과 환자가 될 수 있고 몸의 병이나 마음의 병이나 다 같은 것이고 그 병을 잘 치료할 수 있는 병원이 생겨 안정적으로 케어할 수 있을 때 정신과 환자들도 나머지 사람들도 행복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어렵고 더러운 건 다 안 되고 난 깨끗하고 좋은 것만 취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모순덩어리이다. 지체장애우를 가진 우리 병원 엄마가 아이들의 복지와 관련된 청와대 108배를 하면서 삭발을 하고 나타났을 때는 진짜 너무 미안하고 안타까웠다. 내가 최소한 소아과 의사라면 어려운 이를 배려할 줄 알고 같이 하는 마음을 가진 아이들이 될 수 있게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주면 좋겠다 싶었다.

최소한 나를 거쳐간 우리 병원의 아이들 100명 중 1명만이라도 남을 배려할 줄 알고 어렵지만 이겨내면 더 큰 보람이 있다는 걸 안다면 소아과 의사로서 이보다 더 행복한 일이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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