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옥이 만난 작가] 박생광, 오방색 입은 토속성…한국 채색화의 현대화 견인
[서영옥이 만난 작가] 박생광, 오방색 입은 토속성…한국 채색화의 현대화 견인
  • 서영옥
  • 승인 2019.07.29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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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신앙·불교 이미지 등 차용
무속적 요소에서 민족성 발견
연작 ‘무당’ 색 대비 특히 강렬
대구미술관 박생광 회고전
회화·드로잉 등 162점 선봬
박생광작-무녀시리즈3
박생광 ‘무녀’ 연작.

 

<서영옥이 만난 작가> ‘그대로’ 박생광

“그림에서 감동은 무엇인가? 먼저 생활에 감동해야 되고 사람에 감동해야 된다. 그렇게 하면 그림은 스스로 감동 있는 것이 된다. (1984. 박생광)”

고백하건데 박생광(朴生光, 1904~1985)을 직접 대면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러니 작가가 제안한 생활과 사람에게서 받아야 할 감동은 뒤로 미루어야할 것 같다. 그보다 박생광의 그림에서 주목한 것은 색채였다. 작가가 아닌 그의 그림이 품고 있는 강렬한 색을 먼저 만난 것이다. 박생광이 운용한 색은 날것 그대로였다. 인간 이성의 범주를 넘는 원초적인 움직임 같은 것이다. 특히 ‘무당’ 시리즈가 그랬다. ‘무당’ 시리즈 대부분은 색이 구도나 형태를 압도한다.

대구미술관에서 기획한 박생광 회고전이 현재 진행 중이다. 지난 5월 28일부터 오는 10월 20일까지 열리는 박생광전에서는 회화와 드로잉을 합한 박생광의 작품 162점을 감상할 수 있다. 총 네 개의 섹션 중 첫 번째는 작가가 자연에서 찾은 꽃과 동·식물을, 제 2섹션에서는 여인과 무속화, 그리고 섹션 3은 전통과 한국적인 것으로 채워졌다. 박생광은 민화, 불화, 무속화에서 차용한 이미지들을 오방색으로 풀어낸 화가로 유명하다. ‘민족성을 예술로 승화시킨 작가이자 한국 채색화의 현대화를 이끌었다’는 것이 그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이다.

박생광의 이력을 정리하면 이렇다. 1904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진주보통학교와 진주농업학교를 졸업하고 17세에 일본으로 가(1920년) 교토(京都)에서 미술공부를 한다. 이어1923년 교토시립회화전문학교(京都市立繪畵專門學校)에 입학한 후 신일본화를 공부한다. 당시 조선총독부가 주최한 조선미술전람회(선전(鮮展))에서 첫 입선을 하는가 하면, 1929년부터 일본의 명랑미술전, 신미술인협회전 등에 출품. 1940부터 1944년까지 일본미술원전에 꾸준히 출품하다가 해방 직전에 귀국하여 다솔사에 출입한다. 진주에서 청동다방을 운영하며 진주 문화예술계의 중심인물로 자리 잡고 1949년 영남예술제의 발기인으로 참여한다. 한국전쟁 후에도 진주에서 다방을 경영하며 백양회(白陽會) 창립전에 참가한다. 진주에서 주로 활동하던 그가 상경한 해는 1968년이다. 1967년에는 홍익대학교와 경희대학교에 출강하기도 하였다. 1974년에는 다시 도일하여 일본미술원전의 원우가 된다. 이듬해 세 차례의 개인전을 도쿄(東京)에서 연 그는 1977년 서울 진화랑에서 개최한 귀국전이 왜색풍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1981년 백상기념관 개인전을 통해 독자적인 채색 한국 화가라는 평가를 받은 후 1984년 프랑스 파리 그랑팔레 한국미술 특별전에 초대 출품한 이력이 있다.

일본 체류시기인 1970년대 작품에는 색이 다소 절제되었다. 이때 정교한 화면 배치와 색면분할에서 신일본화풍의 영향을 배제할 수 없다는 평가를 받지만 1980년대에 들어서면 새로운 안료로 차별화된 채색화풍을 획득한다. 민족성을 예술로 승화시킨 작가로서 한국 채색화의 현대화를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은 것은 그의 나이 70대 이후의 일이다. 1985년 작고하기 전까지 한국의 고유한 민족성을 표현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과 고뇌, 암중모색이 가늠된다. 그가 “역사를 떠나고 전통을 떠난 민족은 없다. 모든 민족 예술에는 그 민족 고유의 전통이 있다.”고 하며 한국 민족의 뿌리를 단군에서 찾고 ‘내고(乃古)’로 쓰던 호를 ‘그대로’ 라는 한국식 호로 바꾼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박생광 하면 색이 먼저 떠오른다. 대표작「월벽」(1958)과「밤의 매화」(1976),「무당」(1981),「무속」(1983)등 다양한 작품들 중 특히 ‘무속’ 시리즈를 각인시키는 원색대비는 그야말로 강렬하고 눈부시다. 일본 유학시절을 상기할 때, 유럽에서 1905년부터 1907년까지 유행했던 야수파의 영향도 간과할 수는 없다. 더 직접적인 것은 박생광이 생을 마감하기 전 5여년을 오방색(五方色-황(黃), 청(靑), 백(白), 적(赤), 흑(黑))에 흠뻑 빠져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작고하기 전 80년대를 오방색으로 채웠다. 부적, 굿, 무당 등을 소재로 한 작품이 그렇다. 어릴 적 동무이자 한국 불교계의 거목 청담스님(이찬호)을 그리기도 한 그는 생의 마지막을 종교에 몰입한 것 같다. 종교는 자유로운 영혼이 육체의 속박에 갇혔을 때 갈망하게 되는 탈출구가 아닐까. 인간은 고통과 한계를 느낄 때 신을 찾는다. 예술표현에서 즉흥(또는 興)은 지식을 앞선다고 볼 때, 어쩌면 화가 박생광은 신앙으로 불완전한 자신의 마지막 생과 예술을 정리하지 않았을까. 무(巫)는 신을 초대하여 빛내주면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한다.

박생광이 그의 인생 말년에 독자적인 화풍으로 풀어낸 것은 바로 무(巫)의 표현이었다. “무(巫)는 한국의 종교와 예술의 근간이며 한국인의 핏속에는 무(巫)의 DNA가 녹아 흐른다.” 최광진이 [한국의 미학]에서 한 말이다. 하늘과 땅의 접화의식인 무(巫)의 기원은 불확실하지만 한민족에게는 천신족(단군신화)의 신화가 있다. 최광진은 무(巫)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고조선의 단군은 정치적 군장인 동시에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무군(巫君)이었다. 추수감사제인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예(濊)의 무천(舞天) 역시 제사의식이자 가무와 놀이로 부족 간의 갈등을 해소하는 국가 차원의 무(巫) 행사였다. 삼국시대에 유입된 불교는 고려의 호국불교로써 무를 대신하지만 민간에서는 여전히 무(巫)가 중심이었다. 당시 가장 큰 불교행사였던 팔관회 역시 불교의식이지만 가무를 통해 천신에게 감사하고 지신과 수신에게 제를 올림으로써 무(巫)의 전통을 계승한다. 사찰의 산신각(山神閣), 삼성각(三聖閣) 칠성각(七星閣)도 불교와 무(巫)의 결합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

무속신앙은 한민족의 생활종교이다. 무(巫)자를 풀어보면 하늘(一)과 땅(一)을 기둥( l )이 연결하고 그 양 옆에 인간(人)이 있다. 무(巫)의 메커니즘은 신과 인간을 소통시켜 상생의 관계로 만든다. 무(巫)자에는 소통의 의미가 담겨있다. 전술한바와 같이 무(巫)는 고대 한국 사회에서 정치행위인 동시에 종교의례였다. 춤과 노래로 서로 어울리며 반목과 갈등을 풀어준다. 신과 인간을 이어주고 소통하게 하는 무(巫)의 전통은 외래 종교들에 의해 점차 각색된 것이 본래의 순수성을 잃게 된 원인이다. 무당은 하늘의 신성과 땅의 물질성을 매개하는 존재로서, 무당이 하는 굿은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접화의 놀이이다. 신과 인간, 나와 남이 어우러지며 서로 소통하게 한다. 하여 굿은 매우 직접적이며 체험적인 종교행위인 것이다.

하늘의 소리인 율려를 수신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는 수단이 되는 것은 춤과 음악이다. 무당은 신명나는 춤과 음악으로 무뎌진 감각을 깨운다. 여기서 종교과 예술은 분리되지 않는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은 이러한 굿이 한국인의 정신적 원형임을 파악하고 무당들에게 심한 박해를 가하였다. 민족적인 것에 집착했던 박생광이 무속화를 그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생활을 영위하는데 기본 조건으로 꼽는 것은 의·식·주이다. 그 중에서도 의생활을 첫손에 꼽는다. 옷에는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역사의 흔적이 담겨있다. 선조의 정신도 서려있다. 박생광은 한민족 역사의 흔적을 무복에서 찾고 오방색을 입혀 정신을 대변한 것 같다. 무당의 신명나는 춤과 음악으로 무뎌진 감각을 깨워 억압된 민족의 한을 한바탕 놀이로 풀고 가지 않았을까 한다.

서영옥ㆍ미술학 박사 shunna95@naver.com

박생광
 
※ 故 (乃古)박생광(朴生光, 1904~1985)= 경남 진주 출신이다. 진주보통학교 졸업하고 진주농업학교를 다니던 중 1920년 경도(京都)로 건너가 다치카와미술학원(立川酸雲美術學院)에서 수업했다. 1923년에는 일본경도시립회화전문학교(京都市立繪畵專門學校) 입학하고, ‘근대경도파(近代京都派)’의 기수인 다케우치(竹內栖鳳)·무라카미(村上華岳) 등으로부터 고전과 근대 기법의 결합을 시도하는 신일본화(新日本畵)를 배웠다. 1945년 귀국할 때까지 명랑미술전(明朗美術展)·신미술인협회전(新美術人協會展)·일본미술원전(日本美術院展) 등을 중심으로 활약했다. 광복 후 진주에서 작품 활동. 백양회(白陽會) 창립전 참가하고, 1963년 경상남도문화상 수상했다. 1967년 홍익대학교, 경희대학교 출강했다. 1974년 동경(東京)에 거주하며 일본미술원전 회원, 3차례의 개인전 개최했다. 1977년 귀국과 동시에 진화랑에서 개인전을 , 1981년 백상기념관(百想記念館) 개인전을 열었다. 1982년 인도 성지를 순례하며 뉴델리인도미술협회에 초대전을 가졌다. 1985년 파리 그랑팔레 르 살롱전 특별 초대됐고, 1985년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됐다. 1986년 호암갤러리에서 1주기 회고전이 대대적으로 개최했고, 2019년 현재 대구미술관 회고전이 진행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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