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 구애 없이 즐기고 정서 순화…인생의 활력소
장소 구애 없이 즐기고 정서 순화…인생의 활력소
  • 김영태
  • 승인 2019.08.05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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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강서도회 출신 서예가 수십명
다양한 국·민전 참여 賞 휩쓸어
인격 수양 비중 둔 봉강청년회
월1회 비평시간 갖고 표창 수여
언론서도 관심 갖고 특별 취재
예술가 장남과 대담 시리즈도
소헌선생의작품-귀거래사
제7회 봉강서도회원전에 찬조출품한 소헌선생의 작품 「귀거래사(歸去來辭)」10곡병. 소헌서체(素軒書體)의 대표격인 해서(諧書)작품이다. 1974년 늦은 봄날(甲寅 暮春)에 제작했다. 소헌미술관소장

 

소헌 김만호의 예술세계를 찾아서 (23)-장년시절14. 1974(67세)

장년의 소헌 선생은 자신의 서도세계의 완성에 매진하는 한편, 대구 서도계와 그의 문하(門下)생들 특히 청소년의 올바른 서도풍토 정립을 위한 일에도 남다른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봉강서도회는 그 구심점이 되었다. 소헌의 이러한 인식은 당시 서예계의 안타까운 풍토가 영향을 미쳤다.

당시 매일신문 문화면 특집기획으로 ‘젊은 동인들’(1974.1.22)에서 ‘봉강서도청년회’를 다음과 같이 취재해 보도했다.

「“글씨를 쓰는 것은 습자(習字), 서예(書藝), 서도(書道)의 세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습자라 함은 글자 자체를 익히기 위해서 글씨를 쓰는 것을 말하고, 서예란 순수 조형활동으로 볼 수 있는데 보기 좋은 글씨, 아름다운 글씨 등 기교(技巧)를 위주로 한 글씨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서도(書道)라는 것은 서(書)를 통해서 인격을 형성해 나가는 이른바 정신(道)의 추구에 중점을 두는 것입니다. 우리 봉강서도회는 현대서예가 기교에 편중하는 경향을 지양하고 동양 특히 한국고유의 전통적인 맥락을 고수하는 진정한 서도(書道)를 추구하고 있습니다”라며 한국서예협회 회원이기도 한 남석(南石) 이성조(李成祚·36) 씨는 전통적인 서예를 바르게 배우고 바르게 지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스승을 잘 모시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라고 말하면서 오늘날서예풍토가 잘못 지도하고 잘못 배우고 있는 실정이어서 안타까워 하기도 했다.

소헌(素軒) 김만호(金萬湖) 선생이 주재하여 1964년 11월 15일 발족된 봉강서도회(鳳岡書道會)는 이러한 풍토를 지양, 진정한 서도를 추구하자는데 뜻을 세우고 발족됐던 모임이다.

“처음에는 안이한 생각을 했었습니다. 얼마간만 노력하면 대가(大家)는 못되더라도 어느 정도 되지 않겠냐는 생각이었습니다”라고 회원 남두기(南斗基·23)씨는 말하면서 서도는 끝이 없고 하면 할수록 어려운 길임을 강조했다. 또한 서도는 자신이 자기 작품의 결함을 지각하고 고뇌하게 될 때 비로소 그 문(門)에 들어서게 된다는 것이다. 혜정(蕙汀) 류영희(柳永喜·32)씨는 “여가 선용으로 여성들도 취미생활의 하나로서 서도를 하는 것은 아주 이상적”이라며 “지(紙)·필(筆)·묵(墨)·연(硯)만 갖추면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서도의 편의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리고 박정영(朴貞盈·26)씨는 “저는 시작한지 몇 년 되지 않습니다만 서예공부를 해보니까 정신적인 갈등이 해소되고 글씨를 씀으로써 정신통일이 되는 듯 합니다. 정서순화에 큰 활력소가 되고 있다고나 할까요. 여성들에게도 꼭 필요하고 바람직하다”고 했다.

청년들로 구성된 ‘봉강서도청년회(鳳岡書道靑年會)’는 그간 매월 셋째 금요일에 월례회(月例會)를 열고 회원들이 평소에 제작한 작품을 상호 감상하고 비평하며 현적(顯績)이 두드러지는 회원에게는 격려책으로 수상(授賞)을 하기도 했다. “거의 매일 회원의 2~3명은 서실에 나와 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어른들과의 대화와 지도를 통해 성장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남두기 (南斗基)씨는 자신도 거의 매일 서실에 나와 공부하고 있다며 뭔가 강열한 충동이 통할 때 붓을 들면 희열감과 일종의 만족감도 맛볼 수 있다고 한다.

봉강서도회는 매년 봄에 지(紙)·필(筆)·묵(墨)·연(硯)을 동반하고 봉강서계(鳳岡書?) 취회(聚會)와 야유회를 가져왔는데 지난 73년 봄엔 영남대 학생회관에서 계취(?聚)를 열고 학교 뒷산에서 야유회를 가졌다. 이 야유회 때는 스승과 노장 회원들과의 대화도 한결 부드럽고 흥겹다고 한다. 여성 회원들은 화전(花煎)을 붙이기도 하고 서예작품을 함으로써 생동하는 봄을 만끽하곤 한다는 것이다. 또한 정월에는 친선 윷놀이를 갖고 윷놀이가 끝나면 꼭 휘호(揮毫) 합작대회를 갖는다고.

‘봉강서도회’ 출신의 국전(國展) 입선자 만도 10여명, 신인전과 동아국제미전 등 민전(民展)을 합치면 수십명이 입상했다고 한다. 현 청년부 회원만 해도 이성조(李成祚)씨는 ‘국전’에 몇차례 입상했고 류영희(柳永喜)씨는 15회 ‘국전’에서 한글부문에 입선한 바가 있다. 전진원(全瑨元)씨는 ‘난정27주갑기념휘호대회’에서 특선, 김재순(金載順)씨는 73년도 ‘대학미전’에서 입선했으며 남두기(南斗基)씨는 73년도 ‘전국한글날기념학생휘호대회’에서 대학부 최우수상을 받았고 박성신(朴聖信)씨는 73년 ‘경북도교육자휘호대회’에 입선, 남두기(南斗基) 류재학(柳在學) 박성신(朴聖信)씨는 제1회 ‘화랑문화제’에서 각각 입상한 바가 있다.

‘봉강서도청년회’는 소헌 김만호(金萬湖)씨를 스승으로 모시고 그 인격을 배우며 마음을 닦는데 큰 비중을 두고 서도를 계속 정진하고 있다. <하 략>」

봉강서도회원
봉강서도회 전시회(7회·1974년)를 마치고 난 후 소헌선생과 함께 찍은 봉강서도회 청년부 회원들. 뒷줄 좌로부터 남두기, 전진원, 소헌선생, 박영석, 이상태, 조정군. 앞줄 좌측에서 류재학, 신원일.

이상은 매일신문 ‘젊은 동인(同人)’ 특집 기사(1974.4.22)에서 인용한 것이다.

봉강서도회(회장 김세헌) 7회 회원전은 대구백화점 화랑에서 4월 24일에서 29일까지 열렸다. 출품회원 42명의 작품 80점을 전시하였다. 이들 중 20여명이 ‘봉강서도청년회’ 회원들이다. 소헌 선생은 「귀거래사(歸去來辭)」 10곡병을 찬조 출품하였다.

◇정담(情談)/예도동행(藝道同行)

다음은 1974년에 이태수(李太洙) 시인이 「예도동행(藝道同行)」이라는 정담시리즈를 기획하여 그 첫회를 부자(父子)관계인 소헌 김만호(金萬湖·서예가)선생과 김상대(金相大·음악가)씨의 대담을 취재하여 매일신문에 게재했다.

「예술(藝術)의 길은 구도(求道)의 길이다. 쉽게 걸을 수 있고 누구나 닿을 수 있는 곳에 그 정상(頂上)이 있다면 그건 예술이 아님이 분명할 것이다. 예술의 길은 길고 험하다. 남이 알턱 없는 고뇌(苦惱)를 혼자 겪으며 자기만이 아는 희열(喜悅)도 느끼며 묵묵히 가야 한다. 이 외로운 길에 짝지워 가면 한결 덜 고될지 모른다. 구도(求道)의 벗이 부자(父子)일 수도 있고 내외(內外)일 수도 있고…, 그들의 은밀한 이야기를 들어 본다.<편집자>

서예가 소헌(素軒) 김만호((金萬湖·66)씨의 댁은 ‘예술가의 집’으로 알려지고 있다. 6남이 모두 예술의 길 혹은 그 가까운 길을 걷고 있다. 2남(榮秀)은 서독(西獨)에 유학하여 철학박사 과정을 밟고 있으며 4남(榮泰)은 건축과 회화를, 5남(榮俊)은 바이올린(서울음대 4년, 동아콩쿨 수석1위)을, 3남(榮植)과 6남 상길(相吉)도 가까운 길을 걷고 있다. 김만호(金萬湖)씨와 장남인 바이올리니스트 김상대(金相大)씨의 정담(情談)을 들어 본다. 그들의 창작의 밀실은 1층(父)과 2층(子)으로 나눠 쓰고 있다.

-子. 밤 늦게까지 2층 제 방에서 바이올린 소리가 나면 시끄럽게 들리지나 않는지요.

-父. 아니 그렇게 느끼진 않고, 다만 끝없이 어려운 작업을 밤 늦도록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건강이 걱정스러워 질 때가 많아. 음악(音樂)이 심오하다는 것은 내가 젊었을 때 국악(國樂)에 손대어 봤기 때문에 더 잘 알 수가 있지.

-子. 어렵고 끝이 없다는 것은 예술의 공통 과제일 것 같기도 합니다.

-父. 나의 괜한 걱정인진 몰라도 서도는 시간성(時間性)을 초월 영원히 작품을 남길 수 있지만 음악(演奏)은 시간예술이고 일회성 예술이라 어떻게 남길 수 있을지 궁금하구나.

-子. 그것이 바로 연주가의 비애라 할 수 있습니다.

-父. 과정은 마찬가지겠지. 정신력이 중요하다고 할까. 서도의 경지는 모든 헛된 욕망을 밀끔히 어주고 있지. 선현(先賢)들의 얼 속에 빠져들어가 바로 선현(先賢)이 된다든가, 그들이 미쳐 못 찾고 못 이룬 것을 부단히 찾아 나서는거지.

-子. 방법이 다를 뿐 음악도 결국 추구하는건 같다고 하겠습니다. 또 여담입니다만 아버지는 이웃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지만 전 늘 미움만 받는 것 같습니다. 한밤중에도 바이올린 소리가 많은 이들에게 잠을 망가뜨리곤 하니깐요. 우리 형제가 모두 예술 아니면 가까운 학문을 하고 있습니다만 아버지께선 불만이라도 없으신지요.

-父. 내가 예술을 해서 그런지 늘 반갑게 생각하고 있지. 늘 밀어 주고 싶지만 어려운 길이라 걱정되고 할 뿐이야. (서예를) 권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건 아니지만 형제들이 각기 자기가 좋아하는 예술(음악과 미술)에 열중하는 것이 나는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있지.

-子. 아버진 유학(儒學)의 영향을 많이 받고 계시기 때문에 제 작업을 탐탁지않게 생각하실까 걱정도 될 때가 있었습니다. 선조(先祖)들은 음악을 천시했기 때문이죠. 그러나 적극 밀어주셔서 한결 무거운 은혜를 느끼고 있습니다.

-父. 내가 완고하다는 것은 오해야. 이조시대에는 음악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나는 늘 6藝(禮. 樂, 射, 御, 書, 數)가 다 중요하다고 생각해 왔어. 오직 예술쪽 4형제 모두가 각기 정진해 주기만 바라고 있지.

-子.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높으신 학구열을 본받아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기록·李太洙기자>」

김영태 영남대 명예교수(공학박사,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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