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쏙 빼고 냉정하게 바라본 고유의 개체 ‘라면’
감정 쏙 빼고 냉정하게 바라본 고유의 개체 ‘라면’
  • 황인옥
  • 승인 2019.08.12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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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모 사진전…갤러리 팔조
라면 형태 각각 고유번호 매기고
주민등록증용 증명사진으로
실연에 상처입은 작가 자화상
면발 부서진 모서리에 투영
황인모 작가
황인모 작가가 ‘라면’을 소재로 한 전시 ‘끼니-라면보고서’전 갤러리 팔조에서 열고 있다. 작품 앞에서 작가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신라면, 삼양라면, 안성탕면, 너구리, 비빔면…. 제품명만 듣는데 침이 고인다면 사진작가 황인모의 개인전 관람을 한 템포 늦춰야 한다. 먼저 라면부터 한 그릇 비우기를 권한다. 라면 고문을 당하기 싫다면 말이다. 사진작가 황인모가 갤러리 팔조에서 최근 시작한 개인전에 전시한 작품들이 모두 라면을 소재로 했다. 라면의 면을 촬영한 사진과 실재 면을 비닐에 담은 설치 작품 35점이 걸렸다. 작가가 “국내에서 생산되는 라면은 종류별로 다 모았다”고 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라면에 열광했던 시절이 있다. 시대를 초월해 사랑받는 식료품 중에 라면은 단언컨대 독보적. 가난한 시절에는 배고픔을 달래주는 한 끼 식사였고, 풍요로운 현대에는 청춘들의 최애 끼니가 된다. 라면에 배어있는 대한민국 국민의 특별한 정서는 그야말로 반발불가. 이는 라면을 소재로 한 황인모의 개인전이 작품성을 논하기 이전에 대중적인 관심을 끌 수밖에 없는 이유다.

“국민 최애 식품 라면이 전시장으로 왔죠. 그 사실만으로 사람들이 호기심을 보이는 것 같아요.”

작가가 ‘라면’ 작품들을 앞에 두고 ‘연인과의 이별’과 ‘그로 인한 상처’를 언급했다. 무슨 조합일까 싶어 침을 삼키며 그의 입을 주시했다. 그가 “연인과 이별하고 상처로 괴로워하던 때에 라면이 시야에 들어왔다”고 운을 뗐다. 이 시기에 작가는 두문불출했다. 스스로를 가두고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았다. 바깥활동이라야 라면 구입을 위한 외출이 전부였다. 먹기보다 연명을 위해 라면만 먹던 시절이었다. 이 시기 면이 그의 마음에 박혀들었다.

“동일한 업체의 제품이라도 면마다 모양이 조금씩 달랐어요. 어떤 면은 모서리가 부서져 있었어요. 그 부서진 모습에 제 상처가 오버랩 됐죠.”

작품명은 제조공장과 근로자명 그리고 제조일과 고유번호를 조합해 만든다. 동일 업체, 동일 공장, 동일 근로자가 만든 라면도 고유번호가 달라 개체성이 확보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면의 형태가 제각각이라는 것. 완벽한 개체성의 완성이다. 촉이 빠르다면 고유번호와 라면 사진이라는 조합에서 무언가가 스칠 법도 하다. 바로 주민등록증. 작가가 “라면 사진은 주민등록증에 붙이는 증명사진에 해당된다. 그런 점에서 다큐멘터리 사진”이라고 했다.

전시 제목이 ‘끼니-라면보고서’다. 증명사진 같은 작품들은 하나의 다큐멘터리 작품으로서의 의미인 ‘끼니’에 해당되며, 집합해 놓은 설치 작품들은 아카이브인 ‘라면 보고서’에 해당된다. 전시는 제목과 부합하게 구성했다. 각각의 라면 사진들을 다큐멘터리 사진으로 전시하고, 40여장의 사진과 면들은 설치처럼 모아놓아 아카이브처럼 꾸몄다.

“라면에 사진을 찍고 고유번호를 매기니 사람처럼 관심이 갔고, 관리해야 할 대상처럼 다가왔어요. 상처난 것일수록 더 연민이 갔고 수없이 바라보게 됐죠. 그러면서 저의 상처처럼 벗어던지려 했어요.”

작가가 “프로필 사진과 증명사진을 다르다”고 했다. 프로필 사진이 작가와 충분히 교감하고 피사체의 내면까지 잡아내는 작업이라면, 증명사진은 자료화를 위한 객관적 접근을 요구한다. 작가는 감정없는 증명사진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그림자 배제를 선택한다. 그림자를 없앨 수 있는 환경을 최대한 조성한 후에 동일한 조건에서 라면들을 촬영한다. “라면의 그림자는 라면의 영혼으로 비춰질 수 있죠. 감정을 배제해야 하는데 그림자가 감정 역할을 하면 객관적인 사진을 찍을 수 없겠죠.”

각각의 면들에 동일한 조건을 들이대는 것이 가능할까? 작가는 조명과 구도, 촬영시간과 장소 등 모든 조건들을 동일하게 만든다. 감정없이 면의 형태만 잡아내려는 의도다. 하지만 이 과정에 작가의 의도와 감정을 완벽하게 차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촬영 과정을 제어하는 자체가 감정이 개입된 상태로 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작가 역시도 “다큐멘터리 사진이라고 찍었지만 인화된 사진을 보면 가슴이 먹먹해 진다”고 했다. 말인즉슨 상처입은 작가의 자화상이 라면 사진 속에 겹쳐져 있다는 것. “전투같은 도심풍경이나 회화같은 미니멀한 장소들을 촬영한 이전 작품에도 ‘상처’가 배어있었죠. 이번 작품은 시각적인 결과물은 전혀 다르지만 메시지는 이전 작품들과 연결돼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전시는 9월 2일까지. 054-373-6802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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