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의 줌인아웃]영화 '사자', 안성기의 등이 말하는 것
[백정우의 줌인아웃]영화 '사자', 안성기의 등이 말하는 것
  • 백정우
  • 승인 2019.08.15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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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우의줌인아웃
 

영화제나 시상식에 참석하는 여배우의 화려한 의상은 대부분 등이 깊게 파였다. 맘껏 드러내어 과시하기에 등만큼 안전한 신체부위가 또 있을까. 관객의 시선을 한껏 받은 등은 섹슈얼리티로 만개한다. 이른바 여신 등극. 등은 모든 걸 드러내되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그래도 된다. 관객이 대신 말해줄 테니까(관객의 관심에 조바심 난 일부 배우는 등 대신 가슴이 과하게 파인 의상으로 말 걸어온다).

누군가에게 등을 보인다는 건 상대방을 믿는다는 뜻이다. 적이나 의심스런 대상에게 등을 보이는 사람은 없다. 같은 이유로 뒷모습은 비밀스럽고 꾸밈없다. 얼굴은 속일 수 있어도 뒷모습은 그러지 못한다. 한 세상 잘 살아온 사람의 뒷모습은 듬직하고 안온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품격이 드러난다. 미셸 투르니에가 ‘등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무능한 아버지 시대의 구원투수를 자처한 할아버지에 관한 영화 ‘그랜드파더’ 박근형은 노쇠하고 보잘것없는 노인의 몸을 보인다. 웃통을 벗으며 상반신 뒤태를 드러낼 때, 그의 등은 굴곡진 삶의 흔적이자 조국근대화에 기여한 훈장인 동시에 가부장의 이름으로 휘둘러온 폭력으로 얼룩진 일상의 증거였다. 가리발디 국토회복운동 시절 시칠리를 그린 ‘레오파드’에서 새로운 시대를 뒤로하고 골목 어둠으로 사라질 때의 버트 랭가스터 뒷모습은 쓸쓸하면서 숭고했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멋진 뒷모습이다. ‘사자’에서 안성기의 등 또한 그러하다. ‘사자’를 보는 동안 나는 오직 안성기의 등을 주시했다.

안성기가 연기하는 안 신부는 바티칸에서 파견된 구마사이다. 감독은 세 차례나 공들여 안성기의 등을 주목한다. 심지어 러닝셔츠 사이로 드러난 근육 단면까지 보여준다. 구마 과정에서 입은 상처를 전시하려는 목적치고는 잦고 세밀하다(최초로 구마 신부를 연기한 ‘퇴마록’(1998)에서 등은커녕 사제복 위의 코트도 벗는 법이 없었고, ‘화장’(2014)에선 대중목욕탕 옷 벗는 장면에서조차 등을 노출하지 않았다). 그의 육체는 싱싱하지 않지만 믿음직스럽다. 베테랑 구마사라서가 아니라 안성기라서이다. 어차피 악령과의 몸싸움은 젊은 보조자 박서준의 몫인 것을.

남자배우라고는 해도 결코 쉽지 않았을 왕년의 톱스타가 옷을 벗는다는 행위. 등을 보인다는 건 다분히 의도적이다. 목적이 있다는 얘기다. 우리나이로 68살인 안성기의 처진 근육은 곧 한국영화 역사이다. 젊은 시절 안성기의 모습을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칠순에 가까운 그의 등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반추했을 지도 모른다. 배우와 영화와 팬은 그렇게 나이 들어가는 법. ‘바람불어 좋은 날’과 ‘적도의 꽃’과 ‘깊고 푸른 밤’의 80년대를 질주한 안성기의 몸은 젊고 싱싱했고 ‘태백산맥’에서 ‘투캅스’와 ‘축제’로 이어진 90년대는 활력 넘치면서 강인했다. 2019년 ‘사자’가 전시한 안성기의 등은 풍상을 견디며 달려온 한국영화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나는 안성기의 등을 통해 쇄락한 구마사의 경력이 아닌 책무와 소명을 충실하게 지켜온 인간의 묵직한 세월을 읽는다. 김주현 감독이 관객에게 바라던 바, 한국영화 100년 중 62년을 끌고 온 믿음직한 한 남자의 모습 말이다.

백정우·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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