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적이 울릴 때
경적이 울릴 때
  • 승인 2019.08.19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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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엄마는 무조건 깜빡이를 켜는 연습을 해야 해, 제발.”

계단을 내려서다 말고 멈칫, 급정거하는 나를 향해 뒤따르던 딸아이가 내 등 뒤에 대고 하는 말이다.

지금까지 나는 깜빡이 켜는 일을 등한시하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사거리나 좁은 골목길에서 좌회전이나 우회전을 해야 할 때, 또는 주정차할 때 깜빡이 켜는 일을 잊어먹거나 자꾸 빼먹는다며 동승한 가족들로부터 몇 번의 경고를 받았음에도 잘 고쳐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다행인지 불행인지 운전면허증을 갱신하도록 큰 사고 없이 지금껏 오긴 왔지만, 잔소리처럼 해 대던 딸아이의 그 말이 하필 오늘따라 왜 그리도 크게 들리던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흙으로 그릇을 빚을 때, 초보자들이 흔히 하는 실수는 작은 틈이나 공기의 거품을 놓치는 일이라고 한다. 바로바로 손으로 매만져 틈을 메워야 하는데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거나 그냥 놓아두게 되면 그릇을 구울 때 꼭 깨지거나 갈라진다고 한다.

우리들의 일상에서도 이처럼 바로바로 해야 하는 것들이 꽤 많이 있는 것 같다. 끼니마다 챙겨 먹고 난 후 식탁을 바로 치우는 습관부터 대인관계에서 사소한 말실수에도 미루지 않고 바로 사과하는 일 등등. 그냥 놓아두게 되면 식탁은 곰팡이가 설거나 역한 냄새를 피우게 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도 거미줄을 치거나 원치 않는 틈이 생기고 마는 것처럼 운전석에 앉아 깜빡이를 켜 드는 일이야말로 어쩌면 미루지 않고 바로바로 해야 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한순간 잘못된 선택이나 습관으로 인해 호미로 막을 수 있는 일을 가래로 막기에도 부족한 큰 대형사고로 이어질 수 있을 테니.

얼마 전, 오래된 친구가 처음으로 차에 동승할 일이 있었다. 좌회전 차선에서 깜빡이를 켜지 않은 채, 멀뚱멀뚱 앞을 주시하고 서 있는데 뒤차가 경적을 울리며 빵빵대는 것이었다. 그 소리에 놀라 ‘왜 저러지?’라며 뒤를 돌아보는데 옆자리에 앉은 친구가 대뜸 ‘깜빡이 안 켰네’ 라며 질책을 한다. ‘여긴 원래 좌회전 전용 자리야’ 했더니 ‘넌 이 동네 오래 살았으니까 당연히 알겠지만 처음 이 자리에 서 본 사람들은 좌회전 깜빡이를 켜줘야 자기도 차선을 정할 수 있지. 어찌 알겠냐’ 한다.

내가 아는 것이면 남들도 다 알겠거니 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겠거니 했다. 아는 것이 당연한 일이란 나만의 이기적인 생각에 갇혀 남들이 전혀 모를 것이란 생각을 해 보려 들지 않았다. 친구의 말에 나는 저승사자라도 만난 듯 두 귀가 번쩍 뜨였다. 얼굴을 들 수 없을 만큼 부끄럽고 창피했다. 그리고 미안했다. 그동안 내 등 뒤에, 혹은 내 차 뒤에 본의 아니게 줄을 서게 했던 그 모든 사람에게.

오늘은 집 앞 주차선 안에 차를 대다가 뒤차와 충돌 하고 말았다. 주차한다는 신호인 비상깜빡이를 나는 켜지 않았고 뒤차는 주차하는 나를 보면서도 위험하다는 경적을 울리지 않았다. 결국, 우린 그렇게 사고가 났지만, 서로의 불찰이라 여기고 없었던 일로 하자며 마무리를 지었다. 다행히 사람이 다치지 않았으니 그만하길 천만다행이라 자신을 스스로 다독이며 무사히 넘겼지만 생각해보면 아찔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손길을 더하고 마음을 다하고 연습에 연습을 거듭할수록 매끄럽고 견고해지는 건, 그릇만이 아닐 것이다. 평범한 하루도 보통의 인간관계도 실은 꽤 열심히 매만지고 정성과 관심을 가져야만 얻을 수 있는 결과임을 깨닫는다. 비가 올 것이니 우산을 준비하라는 일기 예보처럼, 누군가 뒤에서 경적을 울릴 때 한번쯤 뒤돌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가끔, 무질서하고 무의미한 삶을 살아가는 듯 여겨질 때가 있다. 하지만 ‘사찰의 풍경소리나 교회의 종소리처럼 마침하게 울려오는 경적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들의 삶이 더욱 풍부해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오늘도 미처 놓쳐버린 틈은 없나 다시금 생각하고 되돌아보는 하루의 가장자리, 서산으로 지는 해가 붉은 신호등을 켜 든 채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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