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량 일취월장한 회원들…독립 서예원도 운영
기량 일취월장한 회원들…독립 서예원도 운영
  • 김영태
  • 승인 2019.08.19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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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에 서도회 소개글 게재
‘회원들 지역 안 가리고 활동
글씨로 인생 알아가야’ 강조
1975년 ‘봉강연묵회’로 개칭
소헌선생의작품-1
1975년 한가을(乙卯仲秋)에 제작한 소헌선생의 작품 「고종황제상춘시(高宗皇帝賞春詩)」. 소헌서체(素軒書體)의 해서(楷書) 작품이다. (184.0x40.0cm, 1975)
 
팔공산동화사근교에서
1975년 초여름 팔공산 동화사 근교의 한 식당에서, 우측에서 소헌선생 부부, 장경선(며느리), 뒤에 김영준(당시 서울음대 재학중). 사진촬영 필자(김영태)

 

소헌 김만호의 예술세계를 찾아서 (24)-장년시절15. 1974(67세)~1975(68세)

1974년은 우리나라가 지하철시대에 접어든 해이다. 70년대에 들어서면서 경제개발과 함께 늘어나는 수도권의 교통수요를 해결하기 위해 지하철건설이 추진되어 1974년 8월 15일에 서울지하철1호선(서울역-청량리구간)이 개통되었다. 지하철 개통은 대중교통 수단으로서 시민의 발과 다리 역할을 하였다. 1970년에 개통한 경부고속도로와 함께 전국 일일생활권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 후 부산(1985), 대구(1997), 광주(2004), 대전(2006) 등 지방에서도 지하철이 개통되어 시민의 교통난 해소에 큰 역할을 하였다.

1974년 이 날은 광복절(光復節)이다. 또한 대한민국이 정부수립(1948.8.15)된 건국절(建國節)이기도 하다. 이 날은 국립극장에서 광복절 29주년행사 도중 박정희대통령 저격사건이 발생하여 육영수여사가 피격되어 현장에서 급사한 날이다(74.8.15). 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영부인의 서거에 온 국민이 슬픔에 잠겼다. 참으로 이 날은 희비(喜悲)가 교차하는 날이었다.

10월에는 대학생들이 데모를 하고 전국의 대학이 휴교 상태에 들어가고 정국은 또 한번 회오리가 일고 있었다. 그 무렵 필자는 대학(영남대)에 복학하여 학교를 졸업하고 교수(敎授)가 운영(한윤호, 박두용교수)하는 건축사사무소에서 건축설계 실무를 하고 있던 때였다. 74년은 필자의 나이가 28세였고 장경선(당시 자인여고 미술교사)과 결혼했던 해여서 45년전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생생하게 스쳐 지나간다.

◇소헌주재(素軒主宰) 봉강서도회(鳳岡書道會)

1975년은 을묘(乙卯)년 토끼띠 해이다. 연초(75.2)에 창간한 서예전문지 「월간서예(月刊書藝)」사에서 ‘봉강서도회’를 지상(紙上)으로 소개하기 위해 소헌 선생에게 투고를 요청해 왔다. 아래는 선생이 만년필로 200자 원고지에 자필 기록한 것이다.

「봉강서도회가 발족한지 어언 12년이다. 무슨 회(會)가 대체로 그러하듯이 봉강서도회도 처음부터 회(會)를 구성하기 위하여 모인 것은 아니었다. 1965년부터 내가 국전(國展)에 연(連) 입선되고 나니 서예동호인들이 자주 찾아와 서예를 논하게 되고 또 한편으로 서예를 배우고 싶어하는 젊은 사람들이 적잖이 찾아와서 필법(筆法)을 묻게 되어 내 주거에는 항상 서예동호인들로 훤화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몇몇 사람들이 발의(發議)하여 모임을 구성하여 동호인 상호간에 면식(面識)을 가리게 하고 또 일정한 날에 한자리에 모여 함께 서예를 강론하고 상호 연마토록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는 의견들이 굳어져 발족된 것이 ‘봉강서도회’가 생겨난 내력(來歷)이다. 본 회가 구성된 이후에는 한층 많은 동호인들이 모여들어 각기의 시간 형편에 따라 밤낮 상관치 않고 함께 글씨 쓰기를 즐겼고 또 월 1회씩 정기집회를 가져 회원들의 작품을 일일이 상호 비평하고 교정(校正)하며 회원 상호간의 향상을 도모해 왔다.

본 회가 성립되어 다년간 자체 수련에 전념해 오다가 1968년에 이르러 그동안의 수련을 자축(自祝)하는 한편 사회(社會) 제언(諸彦)에게 전시하고 질정(叱正)을 받아 보자는 의견이 있어 그 해에 제1차 봉강서도회 전시회를 가졌던 것이다. 봉강서도회 창립전인 셈이다. 그 때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매년 1회씩 계속 전시회를 가져 금년 4월에 제6회 전시회를 가지기에 이르렀다. 금년 전시회에 출품자는 47명 회원의 출품작품 80여점의 다수에 이르렀다.

그동안 본 회에 가입된 회원의 총 수는 246명으로 거기에는 70세 고령을 넘은 노인에서부터 중학생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연령층을 포함해 있고 인적 구성으로는 기업인, 직장인, 대학교수, 대학생, 초·중·고 교사 및 가정주부, 외국인 등 각계각층이 망라해 있다. 회원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국전(國展)에 입선 혹은 특선을 하게 되어 자성(自成) 일가(一家)하여 더러는 독립하여 스스로 서예원을 운영하기고 하고 더러는 경향 각지 타지방(他地方)으로 전출한 회원도 있다. 월 1회의 정기 월례회에는 평균 5,6십명의 회원이 모이고 지방에 멀리 있는 회원은 작품을 우송하여 그 정진을 알려 주기도 하니 실로 흐뭇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중 략>

본인이 이 회를 이끌어 감에 있어서 특히 유의하고 있고 또 회원들에게 강조하고 있는 것은 글씨를 통하여 정신(性靈)을 도야(陶冶)하여 인격을 양성하여 도(道)를 깨달아 가자는 점이다. 한갓 붓 장난이 아니라 글씨를 통하여 인생을 알아가고 인생을 높여가고 인생을 넓혀가자고 강조한 것이다. 심부정(心不正)이면 서부정(書不正)이라 했거니와 참 글씨는 먼저 마음이 발라야 한다. 심(心)은 곧 일신(一身)의 주재(主宰)이다. <중 략>.

학도자(學道者)는 다퇴(多退)하고 학예자(學藝者)는 다시(多猜)한다란 말이 있다. 예(藝)는 정감(情感)의 소산이다. 정감(情感)은 자칫 승기자(勝己者)를 악지(惡之)하는 폐단에 빠지기 쉽다. 서예(書藝)가 예(藝)에 그치게 되는 한 우리도 승기자(勝己者)를 악지(惡之)하는 폐습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고, 그러한 폐습을 면하지 못하는 한 우리 서도인(書道人)들의 존재와 그리고 우리의 앞날은 비참을 면하지 못 할 것이다. 그러므로 본인의 최대의 관심은 본 봉강(鳳岡) 회원으로 하여금 남의 훼예(毁譽) 포폄(褒貶)에 상관할 것 없이 묵묵히 자아(自我)를 수련하여 서도의 경지를 추구하도록 하는데 있다. <하 략>. 1975년 5월 10일 김만호 초(抄). 12일 부송(付送) 월간서예사」

사진2-봉강서도회
‘봉강서도회’ 8회전 개막 후 방명록에 휘호하는 소헌선생(1975.4.24)

제8회 봉강서도회(회장 박선정) 회원전은 75년 4월 24일에서 29일까지 대구백화점 화랑에서 열렸다. 출품자는 김세헌, 박선정, 조용주, 류준규, 권영상, 김상은, 박희동, 이종율, 최순금, 정휘탁, 이완재, 변정환, 서찬호, 김재완, 이정배, 현치덕, 김선희, 김영훈, 한영구, 양태지, 류영희, 김숙희, 황주근, 최성학, 오 절, 김금자, 조정군, 김정자, 이화선, 김재순, 장경선, 박경숙, 남두기, 정문현, 류영숙, 홍경식, 류삼주, 이명옥, 서정숙, 한경애, 정덕희, 류재학, 정양희, 김순재, 이석희, 김진혁, 김희순. 이상 47명의 회원 작품 76점이 전시되었다. 소헌 선생의 작품 「악양루기(岳陽樓記)」 10곡병이 찬조 출품되었다.

이즈음 소헌 선생은 향토의 서화인들과 늘 가깝게 소통하며 친근하게 지냈다. 죽농 서동균을 비롯해서 목산 나지강, 긍농 임기순, 수암 한정달 등과 1960년대 초부터 교우했다. 이도원, 안기식, 김종석 등과도 자주 어울렸고 해동서화협회 회원으로 같이 활동하기도 했다. 이무렵 죽농 서동균 선생의 자제(子弟)인 야정(野丁) 서근섭(徐根燮)의 첫 개인전(1975.4.)이 대구백화점 화랑에서 있었다. 소헌 선생은 죽농 선생과 함께 야정(野丁)의 개인전 개막 테이프를 끊으면서 마음껏 축하하고 앞날의 정진과 건승을 고대했다. 가끔 자식들의 장래에 대해 허물없이 서로 걱정하던 터라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선생은 부자(父子)가 서화(書畵)의 같은 길을 가는 것이 마음속으로 몹시 부러웠다.

1975년 해가 저물어 가는 11월 30일에 소헌 선생(67세)은 첫 손자(聖勳)를 얻어 무척 기뻐했다. 연말에는 ‘봉강서도회(鳳岡書道會)’가 또 한번의 변신(變身)을 꾀했다. 회원 수가 늘어나자 12월 20일의 월례회에서 토의를 통하여 회(會)의 명칭을 ‘봉강연묵회(鳳岡硏墨會)’로 개칭했다. 대부분의 회원들은 회(會)의 성격이 주로 먹(墨)으로서 연구하는 모임이기 때문에 그렇게 바꾸는 것이 타당하다는 여론이 많았다. ‘봉강서도회(鳳岡書道會)’의 명칭은 1957년에 ‘봉강서우회(鳳岡書友會)가 결성된 이후 1968년도에 1회 전시회를 시작으로 하여 1975년 제8회전까지 8년간 ’봉강서도회’ 이름으로 지속이 된 셈이다.

김영태 영남대 명예교수(공학박사,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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