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도 모른 척
알고도 모른 척
  • 승인 2019.08.26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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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란 주부
얼마전 드라마 ‘보좌관’에서 청렴결백하게 살아왔다고 스스로 자부하면서 서민들을 대변한 국회의원이 불법선거자금 5천만원을 받은 사실이 검찰조사 시작되자 자살했다. 자신이 한 일은 아니다. 그를 지지했던 후배가 한 일이다. 그 사람은 드라마에서 말했다. ‘한 번 눈을 감으면 세상을 바르게 보지 못해, 부끄러워’라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더 큰 금액을 뇌물, 편법, 지위이용 등으로 착복하고도 버젓이 살아있는 정치인들이 많은데 왜 그 금액으로 자살까지 하게 만드냐고 제작진을 원망하는 댓글이 많았다.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것을 인정하고 그에 상응하는 죄값을 치르고 반성하고, 더는 그러한 행위를 하지 않고 더 나은 일을 할 수도 있는 사람인데 하는 아쉬움이 컸다. 그렇게까지 부끄러웠나? 아내와 딸을 두고 죽을만큼 견디기 힘들었나? 아니면 자신의 양심과 가족, 후배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랬나?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곤 잊혀졌다.

홍희는 직장생활을 하며 실적압박에 시달린다. 매월 그래프를 그려 동료들과 비교를 당한다. 남보다 처져 핀잔은 듣고 싶지 않다. 한 달 단위로 계획을 세워 목표치를 달성하려 애쓴다. 한 건 한 건 목표치에 도달할 때 성취감과 희열이 생긴다. 그 자체로도 기분이 좋았다. 어느 달이었다. 한 건만 올리면 목표치에 도달한다. 기간이 거의 다 됐는데도 그 한 건이 안 돼 애를 끓이고 있을 때였다. 한 건이 도달했다. 서류상으로는 홍희가 실적을 올린 것으로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실상은 상대방 자신이 도달한 결과물이었다. 홍희는 상대에게 축하한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먼저 말을 하고 상대방이 도달한 것으로 해달라고 했다. 홍희가 실적을 올릴 수 있도록 말이다. 상대방은 손해볼 것이 하나도 없으므로 그러겠다고 했다. 그 전부터 도움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집으로 가는 길에 갈등이 시작되었다. 목표에 도달하여 기뻤지만 꺼림직하기도 했다. 괜히 그런 말을 했나 했다. 아직 기간이 남아있어 더 노력하다보면 목표치에 도달할 수도 있는데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허위실적을 올린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아쉬웠지만 월요일날 출근하면 실적을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녁 반찬을 사러 마트에 들렀다. 고기집 점원이 바뀌었다. 젊은 남자 두 명이 팔고 있었다. 웃는 인상이 선해보였다. 두 종류를 사고 두 봉지에 따로 담아주며 가격표를 붙이고 큰 비닐봉지에 같이 담았다. 계산대로 갔다. 계산원이 바코드를 찍었다. 1만6천500원이었다. 3만 원은 넘을 텐데 금액이 적었다. 바코드를 하나만 찍었나보다. 순간 알고도 모른 척 가만히 있었다. 일부러 속인 것도 아니고 모른 척하고 집에 가면 끝이었다. 계산원이 알고 한 개 더 찍으면 놔두면 되는 거고 홍희는 잘못이 없었다. 주말이 되어 고기를 구워 먹었다. 바코드 찍히지 않은 한 뭉텅이가 더 있었다. 젊고 선하게 생긴 웃는 점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세일하는 수요일에 고기를 사러 또 갈건데 얼굴을 어떻게 볼까 싶었다. 1만 9천 원에 양심을 팔아먹은 것 같았다.

허위실적 1개에 그동안 열심히 일한 자긍심이 뭉개지는 것 같았다. 한 번만 눈 감으면 이번 달도 1등하고, 고기도 양껏 먹을 수 있었다. 그런 생각이 드는 자신이 자꾸만 부끄러워졌다. 고작 이 작은 것 때문에 이런 갈등을 하는 것 자체가 부끄러웠다. 더 큰 판에 끼일 처지가 아닌 자신이 이런 작은 일로 성과를 올리고 배를 채우려하는데 더 큰 판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더 큰 이익에 얼마나 눈을 감고 싶을 것인가?

알고도 모른 척하려 했던 자신이 부끄러웠고 바로 잡고 싶었다. 바로 잡을 수 잇으니 다행이다. 허위실적은 챙기지 않기로 하고, 상대방에게 그런 말을 한 것이 부끄럽고 잘못했다고 사과하며 원칙대로 하겠다고 했다. 상대방은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괜찮다고 했지만 원칙대로 하기로 했다. 고기 비닐봉지를 들고가선 계산이 안 되었다고 다시 카드결제했다. 계산원은 다시 와준 것에 고마워했다.

바로잡지 못해서 너무 부끄러워한 ‘보좌관’의 그 사람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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