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판화 여정…고집스런 기법 독창적 화풍 정립
40년 판화 여정…고집스런 기법 독창적 화풍 정립
  • 황인옥
  • 승인 2019.08.27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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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스케이 갤러리 개관기념전 앞둔 구자현 작가
日서 외국인 첫 화업 도록 발간
석판·스크린·목판·타블로…
다양한 장르 다양한 기법 적용
100호 이상 대형판화 제작
20여회 대외 수상경력 보유
판화 불모지서 꽃피운 개척자
구자현 작
구자현 작.
 
구자현 작
구자현 작.

 

구자현_포토그라퍼 안지섭
구자현.
포토그래퍼 안지섭 제공

국내 판화계를 통틀어 구자현 만큼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작가도 드물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로부터 동떨어진 비인기 종목인 판화에 40년이라는 긴 시간을 천착해온 진정성, 불모지에 가까운 판화 제작 기법을 독자적으로 구축한 점,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던 100호 이상의 대형판화를 제작한 점 등에서 그렇다. 최근 디에스케이(서울시 성동구 성수동) 갤러리 개관기념전을 앞두고 대구를 찾은 작가가 내민 한 권의 도록에서 간단치 않았던 그의 판화 인생을 직감했다. 2016년에 발행한 도록에는 작가가 지난 40년간(1978~2016)의 제작한 판화 전작이 실려 있다.

“‘판화예술’지로 유명한 도쿄아베출판사에서 외국인 최초로 판화도록을 내게 됐어요. 저의 판화 역사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는 도록이라는 점에 의미를 두고 있어요.”

판화와의 인연은 어쩌면 필연이었는지 모른다. 대구에서 섬유회사를 운영하던 부친이 디자이너의 필요성을 느끼고 차남인 그를 홍익대 응용미술과에 진학하도록 권유했지만 기대와 달리 그는 디자이너를 접고 회화(판화)의 길을 선택했다. “대학 재학 중, 학교 도서관에서 우연히 현대미술과 일본 판화에 대한 책을 접하면서 감동을 받았고, 판화 선진국이었던 일본으로의 유학을 꿈꿨다”는 것.

그는 일본 오사카예술대학 미술학부와 교토 세이카대학 미술학부 판화과, 큐슈 산교우대학 대학원 서양화과 등에서 8년간 공부했다. 판화미술의 불모지였던 국내를 떠나 판화 선진국인 일본으로 유학길에 오른 것. “판화에 감명을 받았지만 당시 국내 판화 환경은 열악했어요. 판화지나 잉크, 프레스기가 갖춰진 곳이 없었고, 판화 제작 기법을 제대로 배울 곳도 없었어요.”

첫도전은 석판화였다. 석판화는 판면에 석판화용 크레용이나 해먹, 펜슬 등을 휘발성이 강한 기름으로 녹인 흔적을 찍어내는 방식으로 제작된다. 작가의 드로잉이라는 행위와 질료가 만나 예술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10년 이상의 노하우가 있어야 제대로 된 석판화를 제작할 수 있을 만큼 석판화의 작업 방식은 까다롭다. 작가는 20년 이상을 무던하게도 석판화에 매달렸다. 20년이라는 시간성에서 우리는 구자현만큼 석판화 제작 기법에 능통한 사람이 드물다는 독보성을 찾을 수 있다.

“석판화는 미세한 부분까지 섬세하게 한판에서 농담을 표현할 수 있는 석판화만이 가지는 효과가 있어요. 그리고 원하는 화면을 판을 만들어 멀티플로 제작한다는 것은 오랜 경험과 열정이 없이는 제작이 불가능하죠.”

석판화 이후에 스크린판화를 시작했다. 스크린판화는 화면판 위에 잉크를 붓고, 공판의 위치를 옮겨 다시 찍고 말리는 과정을 반복해 작품을 완성하는 방식으로 제작된다. 구 작가 스크린판화의 가치는 잉크를 반복적으로 올려 두터운 물성을 확보한 데 있다. 이는 기존 스크린판화의 한계를 뛰어넘는 방식이다. “석판화가 섬세해 여성적이라면 스크린판화는 프린팅과정이 시원시원해 남성적이에요. 대형스크린 판화제작에 적어도 5~6명이 달라붙어야 작업이 될 정도로 노동과 노력이 필요하죠.”

판화는 우연과 필연의 산물이었다. 집안의 기대라는 필연성과 판화와 세계현대미술을 접하고 판화에 매료된 우연성이 겹쳤다. 여기에 빠트릴 수 없는 것은 작가 특유의 자존심이다. 그는 매끈한 신작로보다 풀이 무성한 오솔길에 매력을 느끼는 성향의 소유자였다. “아무도 하지 않은 분야여서 한 번 도전해 보고 싶었어요.”

판화에서 구자현을 매료시킨 것은 과정의 철학이었다. 작가는 밑그림부터 프린팅에 이르기까지, 기술적인 단계를 거쳐야 작품을 완성할 수 있는 판화의 엄격한 과정에 주목했다. 그가 판화를 “이지적인 작업”이라고 언급했다. “기술적인 과정에 작가가 개입하기는 하지만 프린팅 후 사인을 하고 나면 그걸로 끝이죠. 다른 개입을 허용하지 않아요. 찍어낸 순간 종이와 잉크와의 관계에서 오는 희열이 있고, 그 심플함이 좋았어요.”

작가가 판화의 또 다른 매력점으로 ‘재료와 도구를 다루는 기술’을 꼽았다. 판화는 재료와 도구를 필요로 하는 작업이지만 도구와 작업 과정을 제어할 수 있는 기술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또한 도구를 갖추고 에디션을 찍기 위해서는 높은 비용을 감수해야 하는 어려움이 따른다. 하지만 작가는 바로 그 지점을 판화의 매력 지점으로 받아들였다. “어렵지만 도전해서 좋은 결과를 얻어냈을 때의 기쁨은 다른 장르보다 크죠.”

구 작가는 필요한 도구나 기계를 직접 구입하고 작품 제작 전 과정에 직접 개입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철저함은 공방에 작품을 의뢰하지 않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또한 직접 우리 한지를 연구해서 판화지, 회화지를 개발해 특허를 획득하기도 했다. 이 모든 노력 뒤에는 독자적인 판화세계를 구축하려는 그의 의지가 있었다.

구자현이 과정 못지않게 중요시하는 가치는 ‘정신성’이다. 작가는 신체성과 간결한 형태 등을 통해 형식성을 추구하는 한편,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녹여내는데도 의지를 불태웠다. 이러한 기조는 석판화, 스크린판화, 목판화, 타블로 전 장르에 적용됐다. 석판화에서 서예의 획을 드로잉 기법으로 표현하며 행위와 물성의 표정을 포착했다면, 스크린판화에서는 원이라는 형상을 통해 윤회, 우주, 행복 등의 세계관을 표현했다. 잉크의 물성을 통해 단순한 그림이지만 밀도 있게 완성도를 높인 것.

그리고 목판화에서는 단순 반복 노동이라는 신체성으로 무상념적 경지에 도달하고자 했다.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동양에서 태어나 동양적인 정신과 철학을 호흡하며 성장했기에 동양적인 철학과 가치관을 수용하는 것은 당연했어요.”

‘회화는 소설, 판화는 시’라는 말이 있다. 드로잉, 제판, 프린팅이라는 복잡한 과정과 전문적인 기술로 시와 같은 판화작품을 만나는 희열을 구자현 역시도 즐겼을 것이다. 특히나 물성과 정신성이 만나 표현해내는 간결하면서도 압축적인 아름다움은 그 어디에도 견주기 힘든 매력 포인트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런 매력에 빠져 작업에 매달려 온 그에게 세상은 국내 판화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찬사를 보내고 있다. 그는 서독프레헨국제판화비엔날레전 4등상 (1986년)을 시작으로 삿포로 국제현대판화비엔날레 스폰서상(1998), 공간 국제판화비엔날레 대상(2002) 등 국내외에서 20여회 수상했다.

판화장르 개척자라는 흔적은 출판에서도 드러났다. 그는 판화 부흥을 위한 책 기법서 ‘판화’(1989·미진사)를 썼고, 번역서 ‘서양판화사 개론’(1994·API ) ‘현대판화의 기초지식’(2002·시공사) 등 주요도서를 펴냈다. 또 판화가 아닌 일반회화작품(타블로)도록을 내년 발행예정으로 있고 번역서로 세계최초의 회화기법서인 첸니니의 ‘예술의 서’도 발행할 예정이다. 디에스케이 갤러리 개관기념전으로 작가의 스크린, 목판화전에 이어 열리는 이번 석판화전은 10월 30일까지. info@dskgallery.com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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