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 유보
판단 유보
  • 승인 2019.08.28 21:2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순호
사람향기 라이프디자인 연구소장
족집게 도사들이 너무 많다. “척 보면 압니다.” 그 옛날 개그프로의 모 개그맨이 했던 유행어처럼 그들은 단박에 사람 깊숙이 숨겨진 진실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듯하다. 아니라고 억울하다고 해도 족집게 도사들은 자신의 입장을 바꾸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사실 깊이 생각해보면 무서운 이야기다. 가짜가 진짜 될 수 있고, 진짜가 가짜 될 수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서론이 길다.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요즘 뉴스, 혹은 기사에 달린 사람들의 댓글을 보고 있자면 족집게 도사들이 너무 많다. 정치인들, 혹은 유명 연예인들의 뉴스가 하나 뜨는 순간 모두 자신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는 지식과, 경험, 그리고 정치적 신념으로 그 상황에 대해서 답을 내려버린다. 얼마나 속도가 빠른지 모른다. 그냥 자기가 본 것이 전부이고,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곧 법이다. 그리고는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을 찾아서 그들과 한편이 된다. 자신과 생각이 같은 사람 한편, 다르게 판단 내린 사람 반대편, 이렇게 아군과 적군이 생긴다. 이 상황은 마치 어릴 적 골목길에서 놀았던 ‘앞에 가면 도둑, 뒤에 가면 경찰’과 비슷하다. 자신과 다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은 모두 적이 된다. 여기까지 들었는데 무섭지 않은가. 아직 이르다. 더 있으니 마음 단단히 먹고 들어 보길 바란다.

상담소에 어느 여성분이 찾아와 몇 시간을 울면서 누군가의 욕을 한다. 누구 이야기일까? 맞다 남편의 이야기다. 그 여성분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남편은 진짜 몹쓸 인간이다. 세상 가장 무능하고, 바람둥이이며, 폭력을 일삼는 그야말로 구제 불능인 사람이다. 혹시 거짓말을 하고 있지는 않나 싶어서 그 여성의 눈을 보면 진심이라는 두 글자가 눈물이 되어 흐른다. 그렇다면 나는 더 이상 남편을 만날 이유가 없다. 아내분의 말만 듣고 아내의 입장에서 상담을 풀어나가면 된다. 그런데 나는 다음번 상담에서 남편을 만난다. 왜 그런 인간 같지도 않은 사람을 만나냐 하겠지만 그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한다. 나의 판단을 잠시 미루고 드디어 남편을 만난다. 그런데 남편의 이야기는 지금까지 들어왔던 아내의 이야기와는 정 반대다. 거짓말 아니라 십중팔구는 아니, 십중구(90%), 십중십(100%)은 아내와 반대되는 이야기를 한다. 사람의 귀가 두 개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쪽의 이야기를 듣고, 반대되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도 들으라는 것에 있다. 그러면 서로 다른 이야기이기에 머리가 아프고 복잡하다. 그런데 그때가 바로 생각하는 시간이다. 던져진 정보에 반응하는 수동적 감각의 순간을 넘어서 능동적 사유가 시작되는 순간이 바로 상반되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다. 요즘 그 복잡하고 머리 아픈 과정을 건너뛰고 싶은 사람들이 많아 보인다. 그냥 기존의 내 생각을 그대로 고수하고 싶은 모양이다.

대한민국의 법은 3심제다. 그래서 1심(지방법원)에서 내려진 판결에 이의가 있으면 다시 항소(抗訴)를 하여 고등법원에서 다퉈본다. 그리고 2심에서 판결이 내려져도 다시 상고(上告)할 수 있다. 그 결과 1심에서 유죄를 받았던 사람이 2심이나 대법원에서 무죄를 받는 경우도 있고, 무죄라고 판결 난 사람이 죄를 인정받아 유죄로 최종 판결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안 된다는 취지의 ‘무죄추정의 원칙’이다. 그야말로 법원에서는 오랜 시간 동안 피고와 원고의 서로 상반된 이야기를 듣고 심사숙고하여 결론을 내린다. 사회복지를 배운 사람은 알 것이다. 사회복지 전문직의 가치에 수용, 판단 유보, 개방성이 있다는 것을. 그 중 판단유보(判斷留保)는 일이나 안건 따위를 일단 뒤로 미루거나 연기한다는 말로 사회복지 대상자들을 만날 때 절대 섣부른 판단을 하지 말고 그들과 대면하고, 또한 선입견 없는 자세로 그들의 이야기를 성실히 듣는 것을 말한다. ‘판단유보’라는 말은 요즘 같은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 우리에게 꼭 필요한 단어다.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판단을 잠시 미뤄두자. 충분히 들어보고, 결과를 지켜보고 그 뒤에 욕을 하든지, 칭찬해도 늦지 않으니 말이다.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94(신천 3동 283-8)
  • 대표전화 : 053-424-0004
  • 팩스 : 053-426-6644
  • 제호 : 대구신문
  • 등록번호 : 대구 가 00003호 (일간)
  • 등록일 : 1996-09-06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대구, 아00442
  • 발행·편집인 : 김상섭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배수경
  • 대구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cbae@idaegu.co.kr
ND소프트
많이 본 기사
영상뉴스
SNS에서도 대구신문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