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잔
눈물잔
  • 승인 2019.09.02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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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쉰다섯, 적지 않은 나이에 몇 번이나 힘든 실패를 경험하고 손목을 그었던 친구가 여행을 떠났다. ‘바람 쐬고 올게.’라는 메시지 한 장 툭, 던져놓고서 무작정 떠났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녀를 오랜 시간 걱정시킨 친구는 어느 날, 낙산사에서 찍은 사진이라며 저녁노을을 보내왔다. ‘꿈이 이루어지는 길’에서 만난 무료찻집에 나붙어 있었다던 ‘오유지족(吾唯知足)’이라는 문구와 함께.

오유지족이란 남과 비교하지 않고, 오직 자신에 대해 만족하라는 뜻이 담긴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산에 오르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기다렸다가 노을을 찍었다는 메시지를 보니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되었다. ‘아직 마음에 가진 소망이 남아있으면 됐다. 먼 곳에서도 생각할 사람이 있으면 된 거다. 아직 자신을 소중하게 여긴다면 그거면 됐다.’며 비로써 가슴을 쓸어내렸다.

친구가 돌아오는 날, 그녀는 일상에서 늘 하던 일을 뒤로 미루고 기차역으로 친구를 마중 나갔다. 친구는 얼룩이 보석처럼 박힌 배낭을 메고 걸인에 가까운 차림으로 나타났지만 표정만은, 하얀 박꽃처럼 해맑았다. 그녀의 집에서 샤워하고 다른 옷으로 갈아입은 친구는 마치 성지순례길 다녀온 사람처럼 몸도 마음도 정화된 듯 맑은 눈빛이었다.

오랜만에 술잔을 앞에 두고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고맙다” 며 그녀가 술 한 잔 따라주자 친구도 “고마워” 라며 소주 한 잔을 따라 주며 물었다. “내가 왜 그 많은 술, 중에서 하필 소주를 좋아하는지 아니?” 낯선 질문에 대해 의아해하는 순간 “소주잔 때문이야. 한 손안에 넣을 수 있거든.” 이야기를 재촉하지 않고 정작 친구가 하고 싶은 말을 먼저 꺼내 놓을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여러 잔을 비운 친구가 전해주는 말은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어느 날, 사는 게 너무 힘이 들어서 산에 올랐는데 하반신이 불편한 장애의 몸으로 정상을 향해 오르는 사람을 만났다는 것이다. 그렇게 불편한 몸으로 산을 오르면서도 세상을 다 가진 사람의 표정을 지으며 편안하고 행복하게 웃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내리막길을 내려가면서도 마찬가지였다고. 친구는 그 사람을 보고 나니 내리막길에서조차 채찍을 가하듯 자신을 몰아세우며 생을 질책했던 자신의 모습이 겹쳐지며 눈물이 나더라고 했다.

무작정 떠난 길에서 그나마 소중한 무언가를 한 수 배워서 돌아온 친구 덕분에 그녀도 새삼스레 일깨운 것이 있다. 친구의 얘기를 경청하며 ‘내리막길을 대하는 자세가 어땠었던가.’ 되돌아보니 그녀 역시 내리막길에서 초조하게 자신을 스스로 내몰았던 기억이 났다. 불안하니까, 더 자신을 구석으로만 내몰았고 기다려주지 못하고 다그쳤으며 여유를 찾지 못했던 기억이 순간 떠올랐다. 인디언 수우족은 9월을 ‘풀이 마르는 달’이라 불렀다. 이제 풀과 나무는 더 성장하고 싶고 더 푸르러지고 싶은 욕망을 접고 땅으로부터 끌어올리던 수분을 차단하기 시작하리라. 봄과 여름엔 식물처럼 성장을 위해 애쓰지만, 가을에 접어들면 모든 욕망을 내려놓고 포기할 것들을 한 번쯤 생각해보는 것, 그렇게 비우고 채우기를 거듭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자연의 일부인 우리의 삶이 아닐까 그녀는 생각했다. 여름보다 좀 더 가벼워지고 그만큼 더 자유로워질 수 있는 9월의 첫날이길 기대하며 다시 한 번, 잔을 부딪치며 그녀와 친구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 아직 한낮의 햇살에 더위가 묻어나는 요즘/ 다른 곳으로 이사하는 일이나, 새집을 마련하는 일도/ 사람이나 거미나 힘든 때라는 생각이 들어/ 거미를 쫓아내고 창문을 닫으려다 그냥 돌아서고 맙니다/ 가을바람이 불어오면 여름을 보낸 사람의 마음이 깊어지듯/ 미물에게도 가을은 예감으로 찾아와/ 저도 맞는 거처를 찾아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정일근 시인의 「가을 부근」이란 시를 음미하며 거미 한 마리의 처지조차도 이해하듯 이 계절을 이 가을을 보냈으면, 다시는 내리막길에서 초조하게 자신을 내몰지 말자는 무언의 약속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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