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옥이 만난 작가] 김종언, 눈 내리는 밤풍경서 엿본 인간사
[서영옥이 만난 작가] 김종언, 눈 내리는 밤풍경서 엿본 인간사
  • 서영옥
  • 승인 2019.09.09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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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간 설경 찾아 전국 발길
가로등 불빛으로 어둠 보완
회색 위주에도 서정성 물씬
김종언 작2
김종언 작.
 
김종언 작
김종언 작.

 

김종언
김종언 작가
어둠이 내릴 때쯤 화가는 길을 나선다. 서두르지 않지만 쉬지도 않는다. 화구박스 대신 카메라를 메고 운전대를 잡은 지 25년 됐다. 자가운전이 아닌 대중교통을 이용하던 기간을 모두 합하면 30년째다. 소명처럼 흐린 날에 나서는 여행길에는 눈과 비, 안개가 동행했다.

발길이 닿은 곳은 거처인 대구 상인동에서부터 서울의 홍제동과 강원도뿐만이 아니다. 광주의 월산동, 목포의 유달동, 목원동 등 셀 수도 없다. 모두 평범한 우리 이웃의 삶의 터전이다. 작가는 다채로운 삶의 스토리가 함축된 이곳을 카메라에 먼저 담는다. 화실로 돌아와 캔버스 앞에 설 때는 여행길에서 고조됐던 절정의 감정이 한풀 가라앉은 다음이다. 물질계의 기록은 완전한 객관성을 유지할 수 없다. 화가는 투명한 느낌에 붓을 맡기고 꿈틀대는 감성과 직관을 고루 버무린다. 바로 김종언(사진)의 회색풍경 탄생 경로이다.

김종언은 지금까지 명리에 연연하지 않고 작화에 침잠한 삶을 살아온 화가이다. 2004년 이후부터 줄곧 풍경화에 몰입했다. 풍경화 전통이 서유럽에서는 종교화에 그 기원을 둔다. 15세기에는 물리적인 세계를 표현하기에 이르렀고 그 자체로 풍경이 중요한 의미를 갖기 시작했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 특히 인기가 높은 장르였다. 이 시기에는 새로운 상인계층이 미술작품 구매층으로 부상하면서 특별장르를 전문적으로 그리는 화가들이 등장했다. 현재도 그 맥이 이어져 구매자와 미술작품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다. 김종언이 한때 대중에게 사랑을 받았던 꽃그림을 멈춘 것은 꽃에 대한 모독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내린 겸손한 결정이다.

김종언에게는 23회의 개인전 경력 외에도 남다른 기록이 하나 따라다닌다. 대학교 4학년 때(1991년) 대구시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경력이다. 이후 30년을 꾸준히 화업에만 전념해온 그는 15년간 노선변경하지 않고 풍경화만 그린다. 이유는 간단하다. “풍경화가 좋아서(인터뷰 내용 중)”이다. 10년 전부터는 눈 내리는 풍경으로 그 범위를 한정했다. “겨울만 알기에도 바쁘고 풍경을 더 잘 알고 싶어서” 라는 것이 그의 대답이다. 외곬으로 한 분야에 깊어지는 쪽을 택한 것이다. 30년을 하고도 “잘 모르겠는 것이 그림이다”라고 하는 그의 말 속에서 아직 정점에 도달하지 못한 작가 스스로에게 들이대는 채찍과 예술가로서의 단단한 철학과 신념이 읽혀진다. 시류에 편승을 거부하는 반골기질과 성찰적 태도도 엿보인다.

김종언이 30년간 지속한 흐린 날의 밤길 여행은 일종의 자유를 찾아가는 행위가 아닐까 한다. 자유는 구속의 상대개념이다. 자유가 미학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은 부조리와 결합한 현대에 이르러서이다. 고대 중국 문화에도 자유와 유사한 개념인 소요(逍遙)가 있다. 장자에 등장하는 소요는 중국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송대에 이르러 몽환감(夢幻感)과 결합하면서 주요한 미적 범주의 지위에서 물러나게 되지만, 자유와 소요는 동서미학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는데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한다. 김종언의 그림도 자유와 소요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가 운용하는 색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무수한 색을 모두 밀어내고 평생 회색 톤만 고집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흐린 날씨의 표현에 회색이 적절하다는 판단 때문일까. 근작(초대전, 더 키움 갤러리, 2019년 7월 1일~8월 31월) 30여점도 같은 맥락이다. 달동네로 이어진 언덕길과 아스라이 멀어지는 철로 등, 햇볕을 잠재운 김종언의 밤풍경은 꾸준히 회색 톤에 기댄다. 향토색을 대변하는 듯한 회색 톤의 아우라가 작가의 체질을 대변하는 것 같기도 하다. 회색 톤은 대체로 저채도이다. 검정색과 흰색의 중간지점이며 무채색으로 간주된다. 무채색은 명도만 있고 채도는 없다. 한마디로 스팩트럼이 넓지 않은 회색은 단색에 가깝다. 정물이나 인물화와는 달리 넓은 면적만큼이나 다채로운 변화가 요구되는 풍경화에서는 표현력이 미숙하면 싱거울 수 있는 단점을 지닌 색이다.

논리적인 분석을 요하지 않는 김종언의 회색빛 그림은 서정적인 분위기가 압도적이다. 그것이 묵향처럼 속되지 않은 느낌을 발산한다. 동양의 산수화와 상통하는 미감도 간과할 수 없다. 자연을 대하는 동양과 서양인들의 태도는 서로 다르다. 동양의 화가들은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세계관으로 산수에 접근한다. 노장사상(老莊思想)이 토대된 동양의 자연관은 자연과 화가를 둘로 나누지 않는다. 반면 서양의 풍경화는 자연계에 대한 인간의 태도와 자연에 속한 인간의 위치를 나타낸다. 거리를 두고 인간이 중심이 되어 바라보는 관점이다. 김종언은 전자의 세계관으로 후자의 화법으로 작업한다. 1990년대 초 계명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기 전 독학으로 그림을 시작할 때부터 김종언이 손에 익힌 것은 서양화법이다.

서양화가들은 15세기부터 야외에서 자연을 스케치 하였다. 18세기 말까지 대부분의 작업은 작업실에서 이루어졌으며 자연에서 느끼는 경외감을 숭고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김종언은 풍경화를 실내에서 완성한다. 회색에 정신을 모두 바친 듯한 김종언의 풍경화에서는 숭고미가 얼비친다. 무심의 미학과도 맞닿는다. 동서의 경계를 흐리는 회색빛 설경의 울림 때문이지 싶다. 울림은 머리보다 가슴으로 다가온다. 그것이 우리를 사의(寫意)의 세계로 이끈다. 치유의 길로 끌어당기기도 한다.

김종언의 회화에는 어김없이 인공불빛이 등장한다. 빛과 어둠은 상반되며 대조적이면서도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달빛에 비견되는 가로등불빛은 어둠을 밝히는데 일조한다. 그 빛은 대체로 잔잔하고 온화함을 유지하며 최소한의 사물인식을 돕는다. 그것이 따듯하다. 니체가 죽음을 얘기하면서 삶을 얘기하듯 김종언은 어둠을 그리면서 밝음을 노래한다. 바로 우리가 치유를 경험하는 지점일 것이다. 사회의 거시적인 담론에서 탈피한 김종언의 설경은 자신만의 아이덴티티로 시대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가치를 품고 있다. 현대인들이 탐닉하고 열광하는 것에서 한발 물러나야만 볼 수 있는 이웃의 평범한 하루가 엿보인다. 그의 풍경이 전경화된 것만이 다가 아닌 이유이다. 풍경 전체가 주인공인 김종언의 그림이 품고 있는 가치는 바로 휴머니즘이다. 피상적인 풍경이 전해줄 수 없는 스토리텔링의 가치가 전도되는 지점이다.

흰점을 점점이 찍어서 내리는 눈의 존재를 새긴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화가가 맞이하는 신선한 순간의 매개는 내리고 있는 눈이다. 눈이 내리면 세상은 온통 힌 빛이다. 색색의 민낯을 흰색이 가리고 세상을 하나로 감싸는 눈이다. 울퉁불퉁하던 높낮이가 엇비슷해지고 뾰족하게 모난 모서리도 두루뭉술해진다. 눈은 빈부격차나 혼탁한 세상을 지울만한 지우개로써 용이하다. 우울을 초월하고 신성한 우주에 공명해 상처 난 우리 가슴을 소생시키는 일등공신이다. 더군다나 김종언이 그리는 눈은 현재진행형이다. 그의 그림에서 세상의 미래는 내리는 눈의 속도와 양에 의해서 결정된다. 미래의 결실이 화가의 손에 달려있다. 우리가 누릴 회복의 기쁨도 그의 손에 달려있다. 이때 예술가는 가치를 만들고 미래를 여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세월은 김종언에게 중후한 회색빛 밤풍경을 선사했다. 자신만의 빛깔로 내적 감정의 정수를 표현해낸 것은 고독을 벗 삼으며 무수히 도전한 연구의 결과이다. 그의 눈 내리는 밤풍경이 점점 밝아지고 있다. 화업에 탄력을 받은 듯하다. 인생의 빛과 어둠, 내면의 빛과 어둠에 따라 변해가는 모델의 얼굴을 거짓 없이 그려나간 램브란트처럼, 거울 속의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들여다본 램브란트처럼, 어둠 속에서 자신과 마주했을 화가 김종언의 밤풍경에서 인간에 대한 애정을 본다. 빛과 어둠이 조화로운 너른 품을 만든 그것이 관람자를 따듯하게 품어 안는다. 오는 10월10일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선보일 신작 준비로 바쁜 김종언의 다음 행보가 기대된다.

서영옥ㆍ미술학 박사 shunna9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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