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영호남 교류전 개최…‘달빛’ 서예 발전 기틀 마련
첫 영호남 교류전 개최…‘달빛’ 서예 발전 기틀 마련
  • 김영태
  • 승인 2019.09.16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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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서예원 주재 안규동 선생
봉강연묵회원전서 합동전 제시
같은해 12월 광주전으로 첫 발
매년 교대로 주관하기로 약속
70세부터 5년간 도자서예 집중
작품 30여점 소헌미술관 보관

 

소헌 김만호의 예술세계를 찾아서 (26)-장년시절17. 1976(69세)~

1976년(69세)은 소헌 선생에게 의미있는 해였다. 9월에 고향인 상주에서 개인전시회(尙州歸鄕展)를 열었다. 1968년 대구에서 가진 첫 개인전 이후 두 번째 개인전이었다. 이 전시회에서 선생은 고향 친지들의 격려와 물심양면의 도움에 큰 보람을 얻었다. 그리고 소헌 선생의 귀향전과 더불어 봉강연묵회(鳳岡硏墨會)가 새로운 전기(轉機)도 마련하게 되었다. 봉강회원전이 창립전(1968)이래 매년 대구에서 전시회를 가져 왔는데 이 해 연말(年末)에 타 지방인 광주(光州)와의 교류전(交流展)으로 활동 영역을 넓히게 된 것이다. 이 해의 마지막을 넘기면서 「영·호남서예교류전개최」라는 큰 결실을 맺은 것이었다.

◇영·호남서예교류전(嶺·湖南書藝交流展)

소헌 선생은 국전(國展)을 통해 평소 친분이 있는 광주(光州)의 송곡(松谷) 안규동(安圭東) 선생과 의견을 교환한 끝에 「봉강연서회(鳳岡硏墨會)」와 「광주서예원필진회(光州書藝院筆陣會)」가 교류의 문을 열기에 이르렀다. 그 계기는 뜻밖에 수월하게 마련됐다. 1976년 4월 봉강연묵회가 제9회 회원전을 가질 때 광주의 안규동 선생이 대구까지 찾아와 이 전시회를 참관하고 교류전을 제의해 왔던 것이다.

광주서예원을 주재(主宰)하고 있는 송곡 안규동 선생에게 봉강전시회 안내 서신을 보낼 때 소헌 선생은 미쳐 그런 생각을 못했다. 축전(祝電)이나 보내오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안규동 선생은 뜻밖에도 대구까지 먼길을 와서 전시회 개막식에 참석하고 작픔을 일일이 관람했다. 송곡 선생은 봉강연묵회 전시회가 예상보다 규모가 크고 수준이 높은 작품이 상당해서 광주의 서예인과 동호인들에게 소개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온 것이다. 또한 교류전을 통해서 두 지역 상호간 서예의 특성을 나눠 감상하는 것은 물론 두 지역 간의 문화교류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소헌 선생은 이 뜻에 송곡 선생과 서로 공감하고 쾌히 동조함으로써 영·호남의 두터운 벽을 깨뜨리고 두 지방의 서예 교류(交流)와 우의(友誼)를 다지는 장(場)이 마련된 것이다. 이로서 영·호남 문화교류의 물꼬를 트게 되었다.

대구의 ‘봉강연묵회(회장,박선정)’와 ‘광주서예원필진회(회장,정채균)’가 공동으로 마련한 「제1회 영·호남서예교류전」은 광주전(光州展)에서부터 시작했다. 1976년 12월 23일부터 29일까지 광주의 전일미술관(全日美術館)에서 열린 이 첫 교류전은 광주의 서예 동호인들에게 큰 호응을 받았을 뿐 아니라 두 지역의 서예 발전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사실 이 무렵까지만 하더라도 영남(大邱)과 호남(光州) 간에는 서로를 멀리하는 경향이 있었고 그 벽을 허물려는 시도는 모색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소헌 선생은 늘 그런 지방색(地方色)을 없애야 하며 바람직하지 못한 배타적(排他的) 분위기를 풀어야 한다고 생각해온 터여서 광주와의 교류는 여러 가지로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확신했다. 선생은 송곡(松谷)과 논의 끝에 매년 교류전을 갖되 대구(大邱)와 광주(光州)에서 번갈아가며 전시회를 갖기로 뜻을 모았으며 이로서 광주에서 첫 결실을 거둬 들일수 있게 됐던 것이다.

전시회를 열고 보니 예상한 대로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우선 서풍(書風)부터 다른 점이 많았다. 영남(大邱) 서예가들의 작품은 웅장(雄壯)하고 남성적(男性的)인데 비해 호남(光州) 서예가들의 작품은 미려(美麗)하고 여성적(女性的)이었다. 그런가 하면 대구 서예가들은 해(諧)·행(行)·초(草)가 능한데 비해 광주는 전·예서(篆·隸書)가 두드러져 있었다.

이 교류전에 출품한 봉강연묵회원은 모두 31명이다. 박선정(회장), 김세헌, 김연권, 안영환,이원룡, 김대환(부회장), 김종식, 류준규, 우상홍, 노재환, 권영상, 김상은, 박희동(총무), 김재완, 서찬호, 장기동, 한영구, 김영훈, 양태지, 류영희, 장경선, 김정자, 이화선, 류영숙, 정문현, 정덕희, 남두기, 김진혁, 신 강, 이정배, 유명희 씨가 그들이다. 이 교류전에 소헌 선생은 행서(行書) 횡액(橫額) 「煙雲筆墨晉蘭亭(연운필묵진난정)」을 찬조 출품했다.

한편 광주서예가로는 정채균(광주서예원필진회장,당시 강진군수)을 비롯 박정주, 김응열, 고귀임(부회장), 오연규 제씨 등 54명이 작품을 내놓았고 송곡 안규동 선생이 찬조 작품 횡액(橫額) 「道明日月(도명일월)」을 출품했다.

광주(光州)에서의 첫 행사에 이어 이듬해 1977년에 대구(大邱)에서 교류전이 이루어졌다. 경북예총(회장,서석규)에서 적극적인 후원이 있었다. 5월 5일부터 10일까지 대구시립도서관 전시장에서 열린 「제2회 영·호남서예교류전」에는 대구의 봉강연묵회원 63명이 107점의 작품을 내놓았고 광주서예원 필진회원 37명의 작품 37점이 출품되었다.

이 두 번째의 영·호남서예교류전은 봉강연묵회의 제10회 회원전을 겸함으로써 의미도 있었지만 향토 서예동호인들이 호남의 작품을 한꺼번에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 더욱 큰 의미가 있었다. 영남과 서풍(書風)이 다른 호남의 작품을 보기 위해 많은 서예 동호인들의 환영 속에서 대단한 성황을 이루었다. 이런 기회가 자주 있으면 좋겠다는 여론(與論)들이 컸다. 더구나 이 전시회에는 송곡 안규동 선생을 비롯한 광주의 서예인들이 직접 참여해 대화의 자리를 가질 수 있어서 모두가 기뻐했다. 영·호남의 문화가 화합하고 소통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이 교류전은 계속해서 매년 대구와 광주에서 교대로 주관(主管)하기로 하고 이듬해 3회 교류전이 1978년 6월 15일에서 6월 20일까지 광주전일미술관에서 열렸다. 제4회전은 3회전 이듬해인 1979년 5월 1일부터 5월 6일까지 대구시민회관 대전시장에서 개최하였다. 영남과 호남에서 매년 번갈아가면서 서예 축제가 성황리에 개최되어 이른바 달빛(달구벌과 빛고을)축제가 이루어 진 것이다. 그러나 이 해(1979)에 광주에서 일어난 5·18사태(광주민중항쟁)의 후유증으로 광주에서 갖기로 한 5회전(1980)은 개최되지 못하고 그 후 2년의 공백 뒤에 대구에서 1982년(1982.7.1~7.5.대구시민회관)에 열렸고, 제6회전은 그 이듬해(1983.4.24~4.29)에 광주학생회관에서 가질 수 있었다. 또 다시 3년의 공백을 거친 뒤 7회전이 대구시민회관 대전시장에서 개최되었다(1986.6.21~6.25). 이 해에는 경남 진주(晋州)의 진주서도원(원장,박춘기)이 참여하여 그 규모가 확대되었다.

소헌선생의도자서예작품
소헌 선생의 도자서예 작품. 왼쪽 첫번째 「백자 반야심경 항아리(白磁般若心經壺」, 40.0x35.0cm, 1981. 오른쪽 첫 번째 작품 「백자 야소산상성훈 항아리(白磁耶蘇山上聖訓壺)」,30.0x26.0cm,1981, 소헌미술관 소장.
 
경산청백요에서
1977년 한여름, 경산 청백요(靑白窯)에서 도자기 작품에 몰두하는 소헌 선생. 부인 박경임 여사와 며느리 장경선이 제작을 수발했다.

◇도자기(陶瓷器)와의 만남

선생은 도자기에 대한 애착이 남 달랐다. 77년 한여름(丁巳仲夏)에 선생은 경산산방(慶山山房)의 청백요(靑白窯)에서 나흘에 걸쳐 도자서예(陶瓷書藝) 작업을 했다. 이는 쉽게 되는 일이 아니었다. 편치 않은 자세에서 둥근 도자 원형(原形)에 유약(釉藥)으로 글씨를 실수없이 쓴다는게 용이한 작업이 아니었다. 부인 박경임(朴瓊任)여사와 며느리인 장경선(張景善)씨가 옆에서 수발을 했다. 백자항아리(白磁壺), 백자병(白磁甁), 백자대접(白磁大 ), 주전자(注子), 필통(筆筒), 연적(硯滴) 등 초벌의 도자 원형(原形)에 「적벽부(赤壁賦)」, 「연년익수(延年益壽)」, 「춘화추실(春花秋實)」, 「월도천심처(月到天心處)」 등 14점의 작품을 했으나 도굴에서 소성되어 나온 것 중 쓸만한 작품은 많지 않았다. 다음 해 1978년 추석날(戊午仲秋節)에 다시 청백요에서 특대형(50.0x45.0cm)의 백자항아리(白磁壺) 「귀거래사(歸去來辭)」와 필통(筆筒) 「명도선생시(明道先生詩)」 등의 작품을 시도하여 완성했고, 1979년에도 「연비어약(鳶飛魚躍)」 등의 도자서예(陶瓷書藝) 제작을 완성했다. 1980년 가을(庚申秋)에는 경산 야천요(野川窯)에서 다시 제작을 계속하여 백자병(白磁甁) 「이백도리원서(李白桃李園序)」, 「화기치상(和氣致祥)」 등의 작품을 했고 이듬해 1981년 단오날(辛酉端陽節)에 백자항아리 「반야심경(般若心經)」, 「야소 산상성훈(耶蘇山上聖訓)」과 백자대접(白磁大 ) 「난(蘭)」, 「죽(竹)」 등의 도자서(陶瓷書) 작업을 했다. 5년간의 열정적인 작업의 소산(所産)이었다. 깨뜨리거나 파손되지 않으면 영구적(永久的)으로 보존이 되는 고귀한 작품들이다. 유족들이 소장하고 있던 선생의 도자(陶瓷) 유작품(遺作品) 30여점이 현재 소헌미술관에서 보존되고 있으며 상설전시실에 전시되어 있다.

1977년에는 경북문화상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어 심사에 참여했으며, 이 해에 한국서예가협회 상임이사로 선출되었고 한국서예가연합회 고문으로 위촉되었다.

김영태 영남대 명예교수(공학박사,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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