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군 합동차례를 모시는 사람들
광복군 합동차례를 모시는 사람들
  • 승인 2019.09.16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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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열 전북대 초빙교수
광복군이란 이름은 아마도 중경 임시정부에서 만들어진 듯하다. 그 전까지는 독립군으로 불렸는데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들어가면서 연합군 특히 미군 측에서 한반도 진공작전을 수행하기 위한 OSS부대를 창설하면서 임시정부 측과 협의하는 과정에서 정식 군대편제를 구축해광복군이라는 정식명칭을 사용하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이 때 광복군 총사령관으로 취임한 분이 철기 이범석장군이다. 이범석은 경기중학교 재학 중 17세의 나이로 중국에 망명해 중국 군관학교에서 수련을 쌓고 이회영 이우영 이시영 등이 창설한 신흥무관학교에서 교관으로 독립군 지휘관을 양성했던 인물이다. 그가 김좌진 홍범도 등과 함께 청산리 전투에서 정규 일본군을 격파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은 많은 역사 자료에서 증명된다. 이범석은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20여 년 동안 만주를 비롯한 중국과 러시아를 누비며 주로 군사 분야에서만 독립운동을 수행했기 때문에 새로 창설되는 광복군 총사령관으로는 더 이상 적격자가 있을 수 없었다. 광복군에는 일제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한 장준하, 김준엽, 노능서 등 혈기 방장한 청년들이 장교로 임관돼 미군의 특수훈련에 참여한 것은 유명한 얘기다.

그들 세 사람이 군복을 입고 총을 들고 찍은 사진은 광복군을 상징하는 모습 그대로다. 장준하는 광복이 된 후 사상계 발행인으로 이승만정권의 독재를 문필로 고발해 큰 인기를 모았으며 동아일보와 함께 4·19혁명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는 평을 받았다. 그는 박정희의 유신이 선포되자 양일동의 뒤를 따라 민주통일당 최고위원으로 유신반대의 최전선에 섰으며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으로 긴급조치가 발동되면서 투옥되는 등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다가 1975년 8월17일 포천 약사봉에서 추락했다고 발표됐지만 누구나 암살됐다고 생각하는 죽음을 맞이했다. 김준엽은 학계에서 고려대 총장을 역임했으며 노능서는 외교활동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 광복군은 미군과 함께 한반도에 진공할 날만 기다리다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탄에 겁먹은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하는 통에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할 기회를 놓쳤다. 백범 김구주석이 대성통곡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미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상태였으나 단 한 번도 연합군으로 전쟁에 투입되지 못했기 때문에 승전국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한국이 오늘날처럼 38선으로 분단되게 하는 단초가 이 때 생긴 것이나 다름없다. 당당히 승전국이 됐더라면 미국과 소련의 국제정치의 희생자로 전락하지 않았을 것이고 국제사회에서 떳떳하게 발언권을 가진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그나마 임시정부 광복군은 격렬한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지만 수많은 독립군들은 국민당의 장개석 군, 모택동의 공산군, 심지어 마적으로 부르는 팔로군 등 항일투쟁에 나선 중국군과 연합하여 치열하게 싸웠다. 물론 중국 땅에서 빌붙어 살아야 하는 애로가 첫째였지만 그들의 지원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무기와 탄약 식량 약품 군복 등 중국의 도움 없이는 자체 조달이 불가능한 게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많은 희생자가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서울 강북구 수유리 북한산 자락은 대부분 국립공원에 속한다. 여기에는 이준 손병희 이명룡 여운형 신익희 김병로 유림 김창숙 신숙 서상일 양일동 신하균 김도연 조병옥 이시영선생 등 독립운동가의 묘소가 산재해 있다. 근현대사기념관 앞에는 이 분들의 흉상이 도열해 있어 산에 가거나 거리를 걷는 시민들이 새삼스럽게 선열을 추모하게 만든다.

이 묘역에 무후(無後) 광복군 합동묘소가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후손이 없다는 이유로 현충원에 안장하지 않고 17위만을 외따로 떨어진 수유리에 모신 것이다. 김찬원 문학준 이해순 김성률 현이평 김유신 백정현 김운백 한휘 전일묵 이도순 동방석 정상섭 이한기 안일용 김순근 조태균 등 열일곱 분이다. 그들이 순국한 곳은 대부분 태행산 전투에서 전사했다. 후손이 없으면 추석 명절이나 설날에 차례를 지내지 못한다. 우리 고유의 풍습에 구천을 헤매는 떠돌이 귀신이 물밥조차 얻어먹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이 여겨 어느 집에서나 차례가 끝난 후 약간의 음식을 그릇에 담아 문밖에 내놓는다. 그러나 천하의 애국지사인 광복군들이 이런 대접을 받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순국선열숭모회를 만들어 천지인산악회의 도움을 받아 추석과 설 다음날 추모식과 합동차례를 지내온 지 10년이 넘었다. 전대열 조대용 김선홍 신은선 등이 주관하고 있으며 김선동 국회의원은 빠짐없이 참석한다. 이번 한가위에도 50여 명이 참석하여 조촐하게 행사를 마쳤다. 보훈처 김상출 북부지청장의 화환이 유일한 정부의 관심일까. 시민들만의 행사로 순국선열을 추모하는 것은 내일의 후손들에게 작은 지표를 던져주는 일이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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