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가 된 12장 한지는 ‘12지신’
서로 엉기어 사는 인간 비유
삶 파편 저장공간 배갯잇 차용
평면·설치·영상·퍼포먼스…
예술장르 경계 너머 소통 형용
짧은 길이의 한지 매듭 열두 가닥을 바닥에 타원형으로 깔고, 그 사이사이에 한지 12장도 놓았다. 소원지에 해당하는 12장의 한지를 돌돌 말아 서로 매듭으로 연결하고, 무당이 쓸법한 방울 꾸러미로 타원형으로 연결된 한지 뒤를 툭툭 내리쳤다. 이후 연결된 12장의 한지에 불을 붙이자 순식간에 연소되어 연기와 재로 허공에 흩어졌다. 작가 심홍재의 갤러리 문101 전시 개막식 퍼포먼스인데, 일종의 기원의식에 해당됐다. 작가가 “12장의 한지는 12지신을 의미한다”고 했다. “12지신은 곧 인간을 의미해요. 인간 사회에서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성을 언급하고 기왕 관계를 맺을거면 서로가 상생하는 화합을 하자는 이야기를 하죠.”
심홍재 개인전이 갤러리 문(MOON)101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명은 ‘획(劃)-화합’. 화합에 대한 이야기를 획으로 풀어낸 전시라는 뜻을 함축한다. 작품의 주제는 관계와 화합, 바라보는 대상은 인간. 인간은 12지신을 대변하는 12개의 점으로 표현되고, 화합은 문자를 해체한 획의 연결성으로 드러난다. 이때 12지신과 획이 구현되는 작가 특유의 공간을 설정하는데, 그것이 긴 타원형이다. 긴 타원형의 바탕 위에 획의 연결성으로 화합된 세상을 구축한다.
타원형의 출처는 배갯잇과 죽부인이라는 의외의 물건들이다. 작가가 “베갯잇에서 타원형을 먼저 차용했다”고 했다. 그에게 배갯잇은 곧 삶의 파편들이 저장되는 공간이다. “제가 바를 운영하고 있는데 어느 날 새벽 3시에 퇴근해 자려고 누웠는데 배갯잇을 보게 되었어요. 배갯잇에 저의 고단한 삶이나 피곤함이 그대로 묻어 있어 눈물이 났죠. 배갯잇에 제 삶이 고스란히 누적되어 있었던 거죠.” 배갯잇에서 시작된 타원형은 죽부인으로 의미를 확장했다. 작가가 바를 운영하면서 바에서 퍼포먼스를 했는데, 그 퍼포먼스의 주 오브제가 죽부인이었다. “죽부인을 소원지를 주렁주렁 매다는 용도로 사용”했던 것.
작업의 핵심 개념은 ‘인간’이다. 죽부인이나 배갯잇에서 차용한 타원형은 인생을 대변하는 상징이다. 그런데 또 하나 작가만의 형질이 드러나는 것이 있다. 바로 획이다. 획을 최소 단위로 해체해 서로 연결해 낸다. 해체된 획은 개개인의 인간을, 획의 연결은 관계성과 화합에 대한 염원을 의미한다. 그가 “홍익인간”을 말했다. “인간은 태어나 죽을 때까지 관계 속에서 살아가죠. 관계야말로 인생에서 어쩌면 전부가 아닐까 싶어요. 그렇다면 서로 좋은 관계로 사는게 서로에게 유리하지 않겠어요?”
획은 글자가 가지는 추상성과 관념성에 주목해 사용한 오브제다. “글자는 인간의 삶을 토대로 만들어졌고, 글자마다 의미가 있어 사용하게 됐어요.” 사실 작품 속 획은 한자인지, 한글인지, 아니면 아랍어인지 정확한 분별이 어렵다. “인간을 이야기하는데 특정 글자일 이유는 없겠지요.” 작가는 획(劃)을 나무 판에 음각으로 새기고 파낸 다음 두꺼운 한지를 덧 쉬워서 눌러 찍어 내는 형식에서 시작해 다양한 판재를 활용한 폭넓은 작업으로 확장하고 있다. 폐 자개농에 새겨진 자개 문양을 오려내고 붙인 조합 등 다양하다.
그의 작품은 동양화와 서양화의 경계지점을 달린다. 고등학교 2학년까지 동양화를 공부하고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작가의 혼재된 정체성의 결과다. 그는 평면, 설치, 영상 등 장르의 경계를 따지지 않는다. 특히 퍼포먼스가 행위로 그리는 그림이라고 할 만큼 평면 작업과 정확하게 맞물린다. “제 퍼포먼스에는 동양의 주술적인 요소들이 있어요. 오방색을 기본으로 하는 것도 그렇죠. 퍼포먼스나 평면 등을 통해 오늘 우리의 시간을 기억하게 하는 것이죠.”
타임캡슐은 한 시대를 대표하는 물건들을 특수용기에 담아 땅속에 보관하고, 일정기간이 지난 후에 발굴하도록 하는 인류 문화유산 보존방법을 말한다. 딱 이 개념에 비춰 작가 심홍재가 자신의 작품을 ‘타임캡슐’에 비유했다. 덧그림없이 그린 드로잉을 선호하는데 이는 그날의 일기와 동일시다. 그날그날의 일기다보니 덧그림과는 거리를 둘 수 밖에 없다. “저의 타임캡슐에는 한 시대의 물건이 보관되지 않아요. 그때 우리가 관계하고 소통했던 내용들이 보관되죠. 결국 삶이란 관계와 소통의 연결이라고 본다면 타임캡슐 속에 담긴 것은 그날 그날의 우리 인생인거죠.” 전시는 24일까지. 053-253-7101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심홍재 작가는 개인전을 16회와 다수의 초대전에 참여했다. 특히 퍼포먼스 작가로 국·내외에서 왕성한 활동하고 있다. ‘푸른 산-맑은 물’을 주제로 전국순회공연을 펼치는가 하면, 2015년에는 ‘동방으로부터’를 주제로 부산을 출발해 블라디보스톡을 거쳐 포르투칼 리스본까지 50일간의 유라시아 횡단으로 한국적 메시지를 작가의 몸으로 전했다. 현재 전주에 거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