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인형의 귀환
바람인형의 귀환
  • 승인 2019.10.14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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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늘어선 가로수 사이를 비집고 가을바람이 분다. 한길 가로 밀려난 자루 하나가 누군가의 발길질에 짓눌려 찌그러진 빈 깡통처럼 구겨져 있다.

길모퉁이, 바닥에 축 늘어진 그를 또 다른 한 남자가 일으켜 세운다. 침낭을 뒤집어쓴 채 잠을 잔 듯, 초췌한 모습의 그가 ‘폭탄세일’이라 새겨진 몸을 펼쳐 보이며 기지개를 켠다. ‘바람인형’이 서서히 깨어나고 있다.

가을바람에 바람인형이 춤을 춘다. 지켜보는 이가 있든 없든 개의치 않는다. 누군가 불어넣어 주는 바람의 힘으로 일어났다가 또한 누군가의 손에 의해 심장에 대못처럼 박힌 바람을 빼주면 주는 대로 그렇게 곧잘 순응한다.

지켜보는 이의 소망을 담은 바람의 힘으로 센 물살에도 굴하지 않고 한 발로 선 왜가리처럼. 지친 기색 한 번 내보이지 않고 불어오는 바람에 온몸을 내맡긴 채 춤을 추는 그의 모습을 대할 때마다 언제나 나는 세상의 ‘가장’들이 떠오르곤 한다.

몇 달째, 해가 중천을 넘어가지도 않은 환한 대낮임에도 하얀 소금꽃을 한 아름 등짐처럼 짊어진 채 퇴근한 남자는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철퍼덕, 방바닥으로 한숨을 부려 놓는 날이 잦았다. 드러누운 소처럼 꼼짝을 하지 않는 불황인 경기가 걱정이라며 잠꼬대를 대내며 한참을 뒤척이다 잠들곤 했다.

얼마 전, 남자의 생일이었으며 30주년을 맞는 부부의 결혼기념일이었다. 저녁이 다 되도록 남자는 기척이 없다. 그의 가슴 위로 꽃잎 떨어져 내리듯 가만히 손을 얹어 본다. 수면 위, 가늘게 떨리던 윤슬처럼 그가 숨을 고르게 쉬고 뱉기를 반복하며 잠들어 있다. 애타는 내 마음마저 헤아릴 여유가 남자에겐 전혀 남아있지 않아 보였다.

‘그깟 기념일쯤이야 그게 뭐라고 목숨보다 귀한 거’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있었다. 불황인 경기에만 온통 집중된 채, 먹고 사는 일 외에 생각이란 어설픈 사치에 불과하다 여긴 듯 보였다.

“돌아와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속상한 일이 생긴 것이 틀림없다./ 옷을 입은 채 잠자리에 들어서는/ 담요 아래로 머리를 파묻고/ 두 무릎을 끌어당겼다./ 나이는 마흔 살 가량, 하지만 이 순간엔 아니다./ 있는-일곱 겹 살갗 너머 엄마 뱃속,/ 보호되는 어둠 속에 있는 동안./ 내일은 전 은하계를 비행할 때의/ 인체의 항상성(恒常性)을 강의할 거지만,/ 일단은 웅크린 채 잠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날마다 먹장구름 끼듯, 가슴 먹먹한 날들이 많았다. 잠든 남자의 머리맡에 앉아 1996년 노벨문학상의 영광을 안은 폴란드의 여성 시인으로 2012년 작고한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 ‘귀환’을 꺼내어 조용히 읽어 본다. ‘두 번은 없다’는 첫 연 또한 죽은 듯 잠들어 있는 남자의 머리맡에 별책부록처럼 놓아둔다.

“두 번 일어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일어나지도 않는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실습 없이 죽는다.// (…)”

엄마 배 속에 있던 그때의 시간을 떠올리며 시 속, 마흔 살가량의 이 사람처럼 남자 역시 잠 속에 든 시간만이라도 고단한 몸을 회복하고 위로받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땅에 허리를 굽히고 가장 순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적요 가득한 거리로 잠시 산책을 나선다.

‘가을 곡식은 찬 이슬에 영근다.’는 한로(寒露)지나 가을의 마지막 절기인 상강(霜降)을 향해 지나가는 길목이다. 머지않아 여름 철새인 제비가 더 추워지기 전, 강남으로 떠나고 이슬은 서리로 탈바꿈해 내리기 시작할 것이다. 잘 여문 곡식과 과일을 거두어들이고 절정에 이른 단풍과 활짝 피어난 국화를 만난 후 겨울 채비를 서둘러 시작해 보려 한다.

여행은 잠시 멈추어 서서 비워낸 다음이라야 더 많은 것들을 보여주고 채워준다. 저녁 늦도록 춤을 추고 선 ‘바람인형’ 앞으로 줄줄이 사탕처럼 관광버스들이 사열하듯 줄지어 선다. 일용할 하루분의 양식을 소진한 배낭을 등마다 하나씩 둘러업은 사람들이 그림자처럼 그 뒤를 따른다.

단풍 같은 옷을 몇 겹이나 덧대어 껴입고 단풍 물들어가는 소리 따라, 가을 속으로 첨벙 뛰어들었다 돌아오는 여행자들의 행렬이 별책부록처럼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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