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우희 주연 ‘버티고’ 위태롭게 견디는 이 시대의 청춘
천우희 주연 ‘버티고’ 위태롭게 견디는 이 시대의 청춘
  • 배수경
  • 승인 2019.10.17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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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가 불투명한 계약 사원 ‘서영’
집·직장·사랑…기댈 곳 없는 일상
다양한 연출 통해 불안한 심리 묘사
위로받기보단 긴장감 속 영화 전개
버티고-3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라고 하지만 누구에게나 흔들림은 힘들다. 언젠가는 꽃을 피울 거라는 기대로 그 흔들림을 견뎌낼 뿐.

서영(천우희)은 아찔한 고층건물에서 근무한다. 그녀는 재계약이 불투명한 계약직 디자이너다. 그녀의 하루는 사무실에 제일 먼저 출근해 서류를 파쇄하고 복사기 용지를 채워넣는 것으로 시작된다. 퇴근 후면 엄마가 전화를 걸어와 신세 한탄을 늘어놓는다. 사내 최고 인기남인 진수(유태오)와의 비밀연애가 그녀의 유일한 숨구멍인 듯 보이지만 그것조차도 위태롭고 불안하기만 하다. 서영에게는 직장도 집도 마음 편한 곳이 아니다.

 

 

몸과 마음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지친 어느날, 그녀의 눈에 들어온 고층건물 외벽청소부 관우(정재광), 유리창 밖의 그 역시 줄 하나에 온 몸을 내맡긴 채 흔들리는 청춘이기는 마찬가지다. 어찌된 이유에서인지 관우는 서영이 신경쓰여 그녀 주위를 맴돌며 지켜본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지나갔다. 몹시 흔들렸지만 잘 견뎌냈다.” 그녀는 이렇게 하루하루를 견뎌내며 살고 있다.

‘버티고’라는 제목을 듣는 순간 누구나 ‘버틴다’라는 의미부터 먼저 떠올리게 된다. 이어서 영어단어 ‘virtigo’가 현기증 뜻한다는 것을 알고나면 영화 내내 서영을 괴롭히는 이명과 어지럼증, 그리고 마치 진공에 갇힌듯한 그녀의 답답한 현실까지 아우른 절묘한 제목임을 깨닫게 된다.
 

영화 ‘버티고’는 오늘도 어디선가 흔들리고 있을 누군가에게 ‘당신만 그런건 아니야’라는 위로를 주는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서영이도 이렇게 버티고 있으니 ‘당신도 아무말 말고 버텨’라고 명령하는 쪽에 더 가깝다.

위로를 기대하고 영화관을 찾은 이라면 내내 서영이와 함께 불편한 시간을 버텨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그녀가 혹시라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면 어쩌나 마지막까지 마음 졸이게 하는 불친절한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는 마치 서영의 일기장을 엿보듯 9월부터 11월까지의 어느 날과 날씨로 장면을 전환시킨다. 장마전선, 맑음, 태풍전야 등 하루도 똑같지 않은 날씨는 그녀의 하루를 미리 예측하게 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서영의 불안한 심리를 묘사하기 위해 감독은 날씨, 빛, 화면, 구도 등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고 신경 써서 연출한 듯 보이지만 정작 중요한 알맹이는 빠진 채 관객 모두를 서영과 함께 화면 속으로 몰아넣을 뿐이다. 서영의 이명과 어지럼증을 함께 느끼도록 만드는 음향과 카메라의 움직임이 마치 관객이 서영이가 된 듯 불안하고 답답하게 만든다.

‘버티고’는 서사의 단단함보다는 사운드와 미장센, 그리고 배우 천우희에게 온전히 기대고 있는 영화이다. 2시간 가까이 극을 혼자 힘으로 끌고 나가는 그녀의 섬세한 연기에는 박수를 쳐줄만하다.

그녀의 유일한 숨구멍이었던 연인 진수의 다소 뜻밖의 비밀, 그리고 상사의 돌발 행동 등은 작위적으로 느껴진다. 영화에 등장하는 여직원의 모습이 마치 90년대의 직장생활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도 아쉽다.

무슨 일이 금방이라도 일어날 듯 불안하면서 숨막히게 흘러가는 시간은 결말에 이르러서 갑자기 판타지가 된다. 내내 긴장 속에서 서영과 함께 버텼던 관객들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된다. 그리고 2시간 가까이 함께 버티는 사이 슬며시 동일시 되어버린 그녀를 위해 이런 바람을 가져볼지도 모른다. ‘그녀가 살아가는 세상이 더이상 버텨야할 곳이 아니기를..’, ‘우리 모두의 삶 또한 그러하기를...’

배수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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