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부산·마산…‘書道 자극제’ 된 국내 첫 순회전
서울·부산·마산…‘書道 자극제’ 된 국내 첫 순회전
  • 김영태
  • 승인 2019.10.28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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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하면서 힘차고 웅려하다”
“신운이 살아 뛰는 무법의 묘”
각 지역 서예가 큰 성원 보내
도연명사시
소헌선생 71세(戊午,1978) 때의 작품 「도연명(陶淵明) 사시(四詩)」. 행초(行草)로 용틀임하듯 구부구불 필획(筆劃)된 묵직한 글자와 음양(陰陽) 정동(靜動)의 장법(章法)이 펼치는 공간경영은 그야말로 춘하추동(春夏秋冬)의 사계(四季)가 그대로 대형 화면(124.5x536.5cm)에 펼쳐져 있다. 물이 흐르는가 하면 구름이 뒤덮히고 온 기운(氣運)이 산(山)을 감싸고 있다.
 
헌김만호서울전
소헌 김만호 서울전(서울 견지화랑,1978.10.27~11.2) 개막 테이프 절단 장면. 가운데가 소헌 선생, 왼쪽이 원곡 김기승, 난곡 김응섭 선생 외 여러 서예가, 내빈들이 참석했다. 1978년 10월 27일.

 

소헌 김만호의 예술세계를 찾아서 (30)-노년기(老年期)4. 1978(71세)~1979(72세)

◇소헌선생 순회개인전

소헌 선생은 정사년(丁巳,1977)의 고희전(古稀展)에 이어 1978년(戊午)에 국내 순회전(巡廻)을 시작하였다. 첫 전시회는 서울 견지화랑에서의 개인전(1978.10.27~11.2)이었다. 지난해의 고희전(古稀展) 때 대구에 내려와 참석했던 서울의 서예가 원곡(原谷) 김기승(金基承), 어천(於泉) 최중길(崔重吉)선생의 서울서의 개인전 권유가 있었고, 당시 국회의장이던 한솔 이효상(李孝祥)선생과 한학자 이가원(李家源,성균관대 교수)박사의 적극적인 추천이 있었다. 한국예총에서 후원해 주었고 한국서예가편찬위원회와 우일출판사에서 협찬을 하였다.

한솔 이효상 선생은 추천사에서 “은은한 신운(神韻)이 살아 뛰는 무법(無法)의 묘(妙)를 보여 준데 대해 그의 구도적(求道的)인 인품을 존경하게 한다”고 했으며, 원곡 김기승은 “청아(淸雅)하면서도 힘차고 웅려(雄麗)한 서풍(書風)은 가히 달관(達觀)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라고 격려했다. 이가원 교수는 거의 매일 전시장에 나와서 소헌 선생과 대화의 자리를 같이했다.

이 분들의 따뜻하고 깊은 호의는 잊어버릴 수가 없고 여생(餘生)을 서도에 정진케 하는 자극제가 되어 주기도 했다. 전시회는 서울의 많은 서예가들이 성원하고 참여해 준 덕분에 예상했던 이상의 큰 성과와 명성(名聲)을 얻게 되었다.

선생의 서울전을 위해 봉강연서회 많은 문하생들이 상경(上京)했다. 서울서 내조(來助)한 회원의 명단이 선생의 비망록(1978.10.27)에 다음과 같이 메모되어 있다. 「서울전시회 내조(來助)회원. 고의환, 김병무, 김명수, 이원우, 안영환, 김대환, 박선정, 박희동, 박기조, 이상태, 홍경식, 전진원, 신원일, 류영희, 이석희, 이옥희, 이화선, 문병권, 임영희, 유명희, 강명숙.」

다음 해(1979) 4월에 개최한 부산전(부산로타리화랑,1979.4.19~4.25)때는 청남(菁南) 오제봉(吳濟峯)선생의 큰 도움이 있었다. 개막식에는 광주의 송곡(松谷) 안규동(安圭東)선생도 먼길로 왕림했고 부산의 서예가와 내빈들, 봉강연서회원의 많은 참석으로 성황을 이루었다. 청남 선생은 “정통적(正統的) 서법(書法) 심원(深源)에 전수하여 고법첩(古法帖) 섭렵 등으로 일심각고묘체(一心刻苦妙諦)를 득했다”고 평했으며,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거의 매일 전시장에 들러 성원해 주었다.

이어서 마산문화방송국 초청으로 가진 마산전(마산문화방송국화랑,1979.4.27~4.30)에서는 문하생인 청헌(聽軒) 조정군(曺廷君,마산 산호당약국 대표)의 많은 노고가 있었다. 마산에서도 김동환씨를 비롯해 지역 유지들의 협력으로 성황을 이루었다. 4회 개인전부터 6회 개인전까지 서울, 부산, 마산을 순회하는 선생의 타지역 나들이전을 한 셈이다. 일흔이 넘어서 가진 전시회였지만 순회전을 하면서 얻은 가장 큰 성과는 더욱 정진(精進)해야겠다는 각오를 굳힌 것이었다. 그러했지만 호남 광주에서 개인전을 못 가진 것이 선생의 마음을 못내 아쉽게 하였다. 훗 날에 광주에서의 전시회를 한번 가지리라 마음 속으로 기약했다.

이 해(1979)에도 선생은 경북도전(慶北道展)의 운영위원으로 위촉되었고, 심사위원장(서예)을 맡아 많은 작품을 심사하였다.

◇사호(賜號)명단

기미년(1979) 선생의 비망록에는 그 때까지 선생이 사호(賜號)한 아호(雅號)가 기록돼 있다. 그 명단은 아래와 같다.

「간송(澗松), 강초(岡楚), 경재(景齋), 계월(桂月), 계정(桂汀), 계파(桂坡), 계헌(溪軒), 기천(杞泉), 난심(蘭心), 난정(蘭汀), 남강(南岡), 남곡(南谷), 남송(南松), 노산(魯山), 노송(露松), 노와(露窩), 노정(蘆汀), 노하(露下), 녹양(綠陽), 도헌(道軒), 동곡(東谷), 동원(東原), 두헌(杜軒), 만강(晩岡), 만성(晩醒), 만송(晩松), 만정(晩汀), 만초(晩初), 매헌(梅軒), 모헌(慕軒), 묵헌(墨軒), 문강(文岡), 백헌(佰軒), 벽강(碧岡), 사헌(斯軒), 상초(商初), 석강(石岡), 석원(石原), 석초(石楚), 석헌(石軒), 소남(韶南), 소봉(素峰), 소림(素林), 소산(素山), 소석(素石), 소암(素巖), 소암(韶菴), 소연(素硏), 소연(素硯), 소와(素窩), 소우(素愚), 소원(蘇原), 소주(蘇洲), 소호(素湖), 송강(松岡), 송남(松南), 송하(松下), 송파(松波), 시헌(是軒), 야송(也松), 야헌(冶軒), 약산(若山), 여강(余岡), 여정(?汀), 연소(蓮沼), 여초(余初), 연강(淵岡), 연정(蓮井), 연지(硏枝), 연파(蓮坡), 우송(友松), 우전(雨田), 우헌(友軒), 원재(元齋), 원포(遠浦), 월곡(月谷), 월산(月山), 월송(月松), 월연(月淵), 월천(月泉), 의재(義齋), 은계(隱溪), 이재(利齋), 인재(仁齋), 이헌(梨軒), 일강(一岡), 일산(一山), 일송(一松), 일원(一苑), 일헌(一軒), 정재(貞齋), 제강(齊岡), 창원(蒼園), 창헌(昌軒), 청강(靑岡), 청하(淸霞), 청헌(聽軒), 취강(翠岡), 취산(翠山), 하헌(河軒), 학강(學岡), 학헌(學軒), 한사(漢社), 해강(海岡), 형재(亨齋), 혜련(蕙蓮), 혜정(蕙汀)」 <가나다순, 필자 정리>. 선생은 일헌설(一軒說,이완재 사호설)을 비롯하여 많은 제자들에게 사호설(賜號說)을 자필로 휘호하여 내려 주었다.

1979년 7월에는 봉강연묵회 정기총회와 봉강서계의 취회(聚會)를 화원동산에서 가졌다. 총회에서 임원진의 개편이 있었다. 아래는 영남일보 문화면(1979.7.12)에 소개된 새 임원진이다.

「새회장에 고의환 씨, 봉강연묵회 정총(定總)-

서도가 소헌 김만호 씨가 주재하는 봉강연묵회(44-5547)는 79년 정기총회에서 임원진을 다음과 같이 개편했다.

△고문:허 흡(許洽),김기승(金基昇) △회장:고의환(高義煥) △부회장:김대환,박희동 △총무:김영훈 △감사:이정배,박정자 △간사:류재학,김희순 그리고 봉강서계(鳳岡書契)의 유사(有司)는 김상은(金相殷)씨와 류준규(柳俊圭)씨가 맡았다」. (1979.7.12. 영남일보)

이 해(1979)에 현대(자)에서 첫 생산한 승용차 ‘포니1’을 구입하여 선생은 팔공산 동화사 근교에서 고사(告祀)를 지내고 왔다(경북1다4859). 가을에 소헌 선생 부부는 ‘포니’ 승용차로 문하생 채약(採藥) 박혁수(朴爀秀)를 대동하고 운전기사와 함께 국내 여행을 하였다. 열하루 동안의 동해안 일주 여행이었다. 영덕에서 문하생인 석강(石岡) 고득성(高得成)씨 집에서 일박(一泊)하고 울진 석류굴을 들러 백암온천의 느티나무 고목(古木) 앞에서 시(詩)를 한 수 지어 읊었다. 설악산을 돌고 양양 낙산사와 의상대, 삼척 죽서루 등지를 답사했다. 금수강산 대한민국의 국토는 진실로 아름다웠다. 청보라 동해 바다의 넘칠대는 물결, 그 위에 하염없이 피어오른 구름. 소헌 선생은 이 땅에 태어난 것이 한없이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이 시기에 필자는 운영해 왔던 건축사사무소를 폐업하고 모교(母校)인 영남대학교 건축학부의 전임교수로 부임(1979.8)했다. 학기가 개강되어 강의가 시작되었으나 학생들의 유신반대 데모로 수업은 정상적으로 되질 않았고 캠퍼스는 몹시 어수선하였다. 이윽고 대학은 휴교가 되었다. 10월에는 부산시민과 마산에서 대학생들이 유신철폐를 외치는 시위(釜馬사태)가 계속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0월 26일에 박정희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으로 현장에서 급서(10·26사태)하였다. 최빈국이었던 우리의 ‘조국(祖國) 근대화’와 ‘민족의 중흥(中興)’을 위해 혼신(魂神)의 힘을 쏟았던 대통령의 급작스런 서거(逝去)에 온 국민의 놀라움은 이루 형용할 수가 없었다. 최규하 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정국은 그야말로 살얼음판 같은 위기의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김영태 영남대 명예교수(공학박사,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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