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以聽得心’ 소통·차별없는 등용…조선개혁 이끈 참리더
‘以聽得心’ 소통·차별없는 등용…조선개혁 이끈 참리더
  • 이대영
  • 승인 2019.10.30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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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창제부터 대마도 외구소탕까지
매번 판 뒤집는 ‘게임 체인저’ 기질
재위 32년간 토론회 2천여회 육박
17만 백성과 소통 ‘숙의정치’ 실현
유비무환 태세로 현명한 대명외교
매사에 ‘골드아워’ 절대 놓치지 않아
인재들 모아 가까이 두고 학업 독려
자격루·신기전·금속활자·측우기 등
신택리지-세종대왕
세종대왕 당시 국가혁신역량은 영국의 산업혁명 당시를 추월했다. 그림 이대영

 

이대영의 신대구 택리지 - (42)세종대왕으로부터 현황타개 비법을 배우다

세종대왕(1397~1450)은 당시 마작(麻雀)에 비유해 “어떤 경우도 자기가 가진 패만 잘 써도 이긴다”는 말을 늘 했다.

구체적 사례로는 i) 셋째 왕자로 국왕에 등극, ii) 영의정 최만리의 반대에도 훈민정음 창제, iii) 조명준동(朝明蠢動)의 근원을 제거하는 대마도 왜구소굴 소탕, iv) 대명국가기밀이었던 책력(冊曆)을 칠정산내외편으로 대체해 와 천문과학기구 발명으로 일식공포까지 없앴다. v) 완강한 사대부 저항에 중인과 노비까지 등용하는 판 뒤집기(game change)를 해서 판판이 이겼다.

세종의 일머리는, 만약 ‘비밀통로 찾기’ 그림퍼즐에 빗댄다면, 우리는 입구→출구로 조심스럽게 선을 그어 비밀통로를 찾으나, 세종은 출구→입구(반대)로 막힘없이 한 번에 쭉~ 선을 그어대는 장난꾸러기다. 그럼에도 매사에 합리적 포기시점(reasonal renunciation point), 중간전환점(middle turning-point) 혹은 연착륙(soft landing)과 같은 출구전략(exit planing)을 반드시 마련하기에 절대로 함정에 빠지지 않는 센스쟁이다. 때로는 닭을 잡아도 소 잡는 칼을 들이대는(牛刀割鷄)는 무모함이 있지만 반드시 뒤에 비책을 마련하고 대들었다.

세종에 대한 가장 큰 수수께끼는 i) 맏형인 양녕대군(讓寧大君), 둘째인 효령대군(孝寧大君), 셋째 충녕대군(忠寧大君)이었던 그가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게 된 형제간의 인정머리였다. ii) 스승 이수(李隨, 1374~1430)로부터 국왕으로서 그릇 만들기 혹은 왕재(王材)로서의 깜냥을 남모르게 갖췄다. 이를 눈여겨봤던 태종은 아예 제왕서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론하도록 이수에게 허락했다. iii) 그의 위정철학은 “아무리 좋은 패를 받았다 해도 반드시 이길 수는 없으나, 가진 패만 잘 쓰면 반드시 이긴다.” 즉 게임 딜러(game dealer) 혹은 게임 체인저(game changer)로 판 뒤집기를 하는 것이다.

◇ 귀를 주고 마음을 얻다

조선의 2대 개혁군주 세종(世宗)과 정조(正祖)의 차이점은 : i) 아버지 태종이 눈에 거슬리면 닥치는 대로 혈육인 형제들까지도 죽였기에 세종을 따르는 신하는 하나도 없었다. 영의정 최만리(崔萬理)에서 하급관리까지 세종에게 구밀복검(口蜜腹劍)의 관계였다. 적재적소의 인물등용에 대한 사대부의 저항으로 중인과 노비까지 등용했다. 이에 반해 정조는 정약용을 비롯해 실사구시(實事求是) 혹은 이용후생(利用厚生)의 기치 아래 모였던 거대한 실학지식집단을 가졌다. ii) 세종의 ‘귀를 주고 마음을 얻는’ 소통 방법으로 “(상대방의 말을 다 듣고 난 뒤) 대신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러나 내 생각은 이렇다네.” 이에 정조는 국왕의 위상을 지키는 소통으로 “(상대방의 말 중간을 잘라서) 대신의 말은 틀렸어. 왜냐 하면 이렇고, 이래서.”라고. 조선실록에서 노하다(怒) 혹은 크게 노하다(大怒)를 산출하면, 세종은 노(怒) 16회, 대노(大怒) 3회, 태종 노(怒) 94회, 대노(大怒) 3회, 영조 노(怒) 135회, 대노(大怒) 16회로 나타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세종의 재위기간 32(1418~1450)년간 무려 1천 898회 토론회를 개최해 숙의정치(熟議政治)를 했다. 심지어 최장 숙의(最長熟議)의 기록으로 14(1430~1444)년간 17만3천 명의 모든 백성과 소통했다. 늘 귀를 열어놓았다. ‘대왕을 욕하는 백성이 있다.’는 보고를 받고 “백성은 국왕의 어버이인데, 자식이 어버이의 뜻을 얼마나 어긋났으면 욕까지 하겠나(民爲帝之親, 親侮帝如何)?”하면서 “과인이 친히 정중히 사과합니다.”고 무죄 석방했다. “백성과 소통이 되지 않으면 나라가 상하고, 과거를 잊으면 앞날이 없다.”는 역사적 교훈을 명심했다.

“나는 잘 모르니 토론해 결정합시다”라는 제1성으로 숙의정치(熟議政治)를 시작했다. 이를 통해 i) 시행착오 최소화, ii) 적극적인 참여 유도, iii) “어렵다는 생각이 들 때 백성과 더불어 한다면 할 수 있다(如其可疑, 則與民可矣).” 백성으로부터 추진동력을 얻는다. iv) “여러 의견을 들어 미심쩍은 것은 옆에 제쳐놓고, 그 나머지를 아주 조심스럽게 실행하라. 그러면 잘못을 덜 하리라. 여러 가지를 찾아보고서 문제가 될 만한 것은 옆에 제쳐두고, 실행하라. 그러면 뉘우치는 일이 없으리라. 말에서 잘못을 덜하고, 실행에서 뉘우치기를 덜 하면 안정된 행정이 될 것이다.”가 그의 소통철학이었다. v) “반드시 할 일을 앞에 두고 두려워하고 미리 지혜를 내어 계획을 짜는 등 늘 잘 하려고 최선을 도모했다(好謀成事).” 오늘날 용어로는 역산스케줄(backward schedule), 출구기획(exit planning), 연착륙기법(soft landing technique)을 동원해서 숙의정치를 했다.

◇ 골드 아워(gold hour)만은 절대로 놓치지 않았다.

‘때를 만나면 하룻밤에 등왕각에 가서 천복비(天福碑)의 비문을 얻을 수 있지만, 다음날에 간 사람은 천복비가 벼락을 맞아 깨져 비문을 얻지 못했다.’라는 고사처럼 세종은 매사엔 골드 아워(gold hour)가 있다고 믿고 절대로 놓치지 않았다. 방법은 간단했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이었다. 당시 대명외교관계로 골치가 아팠다. 아무도 몰래 중국어를 익혔다. i) 상대방의 신체변화를 통해 속셈을 간파, ii) 공식적인 통역이전 짧은 시간을 활용해 반박과 논리를 구상, iii) 공식통역과 자신이 간파한 내용과 차이로 계략을 간파, iv) 국왕을 골탕 먹이려는 통역관의 농간과 각종 사대외교의 꼴불견을 모르는 척했다(전략적 인내). v) 고민하는 척하면서 한 수 위의 대책을 강구했다. 구체적 사례로 명나라 대신들이 사사건건이 조선의 내정에 간섭과 생트집을 잡았다. 세종은 단박에 명황제의 속마음을 간파하고, 1419년 6월에 이종무(李從茂)를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에 임명해 곧바로 명일대리전(明日代理戰)에 말려들기 전에 병선 227척, 병사 1만 7천명으로 마산포(馬山浦)에서 대마도를 진격, 왜구소굴을 소탕했다.

뿐만 아니라, 조명외교관계(朝明外交關係)에 있어서도 대명 50만 대군에 10분의 1 정도의 군사력으로 대항력을 갖기는 불가능했다고 보고 왕자로 있을 때 1413(태종13)년 2월 5일에 임진강(臨津江)에 거북선(龜船)을 봤던 경험을 회상하면서 비대칭전력 강화 묘안을 도출했다. 최첨단병기로 오늘날 폭탄에 해당하는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와 미사일 혹은 다연장로켓인 신기전(神機箭)을 발명해 비대칭전력(symmetrical military power) 세계 최강첨단무기로 무장했다.

◇ 집현전(集賢殿)을 통한 국책개발과 국가동량을 육성

오늘날 세계경제군사대국인 미국에 국책연구기관이 3천600여개나 된다는 사실을 모두가 다 안다. 우리나라의 이런 국책연구기관으로 1420년 세종은 역량이 출중한 젊은 인재(才行年小者)를 신분과 관계없이 모아 학술 및 문화적 업적을 완성할 터전을 마련했다. ‘국조방목(國朝芳目, 1392~1844, 조선조 과거합격자명단)을 보면 집현전 출신 장원급제자로 정인지(鄭麟趾) 외 5인, 2등 6인, 3등 신숙주(申叔舟) 등 11인, 4등 7인, 5등 45인이나 되었다.

이들을 세종의 집무실이었던 근정전(勤政殿) 가까이에 두고, 관심을 표명해 학업까지 독려, 수시로 자문을 구해 국정에 반영했다. 집현전을 통한 국책사업을 요약하면 i) 각종 고제해석(古制解釋), ii) 국책자문과 각종 경연, iii) 저술과 편찬사업, iv) 새로운 조선책력 개발과 천문학 연구, v)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통한 국책과제를 개발했다.

1983년 일본 동경대학(東京大學) 연구진이 세계역사를 통시적으로 분석했던 과학사기술사 사전(科學史技術史事典)에 따르면 1400~1450년 사이 세계과학기술의 주요업적으로 등재되었던 건수가 중국이 5건, 일본은 0, 동아시아 외 전 지역에서 28건이 있는데 한국은 29건으로 가장 많았다. 이 조사기간은 세종 재임기간(1418~1450)과 일치하며, 당시 발명품으로는 i) 자격루(自擊漏), 측우기(測雨器), 금속활자, 천문관측기기, 신기전(神機箭) 등 29 건인데 이들은 세계적인 발명품으로 세계최고 수준이었다.

이런 국가혁신역량(national innovation competency)은 세계사에서 영국의 산업혁명 당시를 추월했다. 이런 국가혁신역량은 곧바로 세종의 개인역량뿐만 아니라 집현전(集賢殿)이란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의 조직혁신역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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